내일신문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데

구상낭 2023. 10. 23. 21:21
2018-05-03 11:53:14 게재
가슴은 설레지만 머리가 어지럽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남측 구역으로 내려와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손잡고 긴 봄날을 보내며 환담하고 산책하고 부부동석으로 만찬을 하고 돌아간 후 많은 사람들은 무엇에 홀린 기분이다. 하지만 그건 환영(幻影)이 아니라 우리 눈앞에 전개된 엄연한 현실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전 세계 언론 앞에서 북핵문제 해결의 키워드인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협정'이란 문구가 들어간 남북정상 판문점선언문에 서명했다. 1년 전 막말을 쏟아내며 핵실험을 하고 태평양을 향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간단없이 시험 발사하며 전쟁위기로 몰아갈 때를 생각하면 백팔십도 바뀐 김정은의 태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그때의 언행이 진심이고 지금의 언행은 위장인가. 아니면 그때의 언행은 위장이고 지금의 언행이 진심인가. 어느 야당 대표의 논평처럼 '위장평화쇼'로 단순히 규정해버릴 수 없는 '무엇이 진행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김정은이 판문점에서 보여준 행보는 지난 2월 평창 동계올림픽에 여동생 김여정을 특사로 보내 문재인 대통령과의 회담을 제의하면서 남북 분위기를 해빙시키고 남한을 놀라게 했던 때보다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번 문재인-김정은 판문점 회담 말고도 남북한은 두번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비행기를 타고 평양을 방문했고,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판문점의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양을 방문했다. 두 정상회담의 북한 측 파트너는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이었다.

이 때 남북정상이 만나는 모습을 보는 시선은 감동과 의혹이 혼재된 것이었다. 정상회담은 쌍방의 이익에 근거를 두고 열리는 것이지만 남측이 원한 인상이 깊었다. 때문에 문제의 본질인 북핵 문제는 남북정상 회담의 핵심의제가 되지 못했다.

이번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은 접근 방법과 지향점이 달랐다. 김정은이 선제적으로 남북정상회담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북한 180도 태도 변화에 머리 어지러워

연두 발표를 통해 핵 완성을 선언하고 평창동계 올림픽 참가를 결정적 계기로 잡아 대표단으로 동생 김여정을 보냄으로써 한국은 물론 미국을 향해 대화모드로 전환했다. 그리고 평양을 방문한 문 대통령 특사단에 남북정상회담의 의제로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논의할 수 있음을 밝혔고, 이 문제를 놓고 트럼프 미국대통령과 직접 만나 논의할 수 있으니 문 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의 중재자로 역할을 해줄 것을 사실상 요청한 것이었다.

트럼프는 전격적인 북미 정상회담 수락으로 반응했다. 한반도 운전자론 주장으로 서늘한 반응을 받았던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의 중재자로 뜨겁게 떠오르는 계기를 잡았다. 대륙간탄도미사일문제를 포괄하는 한반도비핵화와 북한체제를 보장하는 평화협정 문제는 이제 5월 중에 열릴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의 의제가 된다. 문 대통령은 진보성향 대통령으로서 김정은으로부터 호감과 신뢰감을 얻는 한편, 트럼프에게 협상여지와 공을 돌리는 절제의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현재까지는 중재자로서 성공에 다가서고 있다.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 논의 핵심은 북한의 핵시설 및 핵무기의 폐기와 이에 상응하는 보상으로 미국이 북한의 제체를 보장하는 평화협정 패키지일 것이다.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실현하고 미국이 북한과 평화협정을 맺고 국교 정상화를 하는 것, 바로 이게 김정은 위원장도 원하고 문재인 대통령도 의도하는 한반도 문제 해결 방식인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은 폼페이오 CIA국장을 북한에 보내 직접 김정은을 만나 자신의 의지를 명확히 전달했고, 김정은의 비핵화의지와 핵포기에 대한 요구조건을 정확히 확인한 것 같다. 트럼프는 폼페이오를 국무장관에 앉혔다.

'총론 합의, 각론 파탄' 위험 도사려

이제 남은 것은 트럼프의 마음에 들게 김정은이 '완전한 비핵화' 실행계획을 내놓는 것, 그리고 체제보장에 대한 김정은의 불안을 해소해 줄 수 있는 미북 평화협정 패키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북한의 모든 핵시설을 사찰하고 핵무기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하여 폐기하는 작업은 만만한 일은 아니다. 김정은으로서는 30여년에 걸쳐 국력을 쏟아부으며 개발한 핵무기와 핵시설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확고한 체제보장과 경제적 보상을 확보하는 것이 죽고 사는 문제라고 생각할 것이다. 실행의 난관이 여기에 있다.

바로 '총론 합의, 각론 파탄'이 위험으로 도사려 있다. 여기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협상 격언이 부각되는 것이다. 적대관계 70년과 북핵 위기 25년의 불신은 어느 순간 디테일의 악마를 부를 수도 있다.
김수종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