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2014-11-03 16:53:49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니 곧 추위가 올 것이다. 나라 안 걱정거리가 폭주하고 있지만 월동 에너지 걱정은 별로 없는 같다. 석유 값이 뚝뚝 떨어지면서 개인, 기업, 정부 모두 오래 만에 고유가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있다. 게다가 ‘블랙아웃’(정전사태) 공포가 지난 여름 자취를 감췄으니 안도의 심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난 6월 국제 유가가 배럴당 115 달러를 친 후 계속 떨어져서 현재 85달러 근처에서 잠시 쉬고 있다. 전문가들은 석유 값이 더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왜 석유 값이 이렇게 떨어질까? 한마디로 설명하면 수요는 줄고 공급이 늘었기 때문이다. 수요가 준 것은 유럽과 중국의 경기 침체로 석유 소비가 줄어든 탓이지만 공급이 늘어난 것은 아주 색다른 이야기, 즉 미국에서 터진 ‘셰일혁명’ 덕택이다.
셰일(shale,頁岩)층은 지질학적 연대에 땅 속 수백 또는 수천 미터 깊이에 형성된 퇴적 지층이다. 석유와 가스가 이 지층에 묻혀 있다. 21세기 들어 미국 석유 채굴 엔지니어들은 수평시추공법과 수압파쇄공법을 융합 발전시켜 셰일층에서 석유와 가스를 대규모로 뽑아내기 시작했다. 물과 모래와 화학약품을 고압으로 쏘아 땅속 암벽을 부숴나가는 놀라운 기술혁신이다.
전통적인 유전이 고갈되어 가던 미국은 셰일 석유 생산이 본격화하면서 산유량이 2008년 이후 60%가 증가했다. 물론 셰일 가스 생산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른바 셰일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셰일혁명은 2008년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다. 10년 전, 그러니까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사담 후세인을 축출한 이듬해인 2004년 2월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의 세계 전략과 석유 권력에 대하여 대대적인 특집 기획 기사를 연재했다. 이 신문은 당시 미연방 석유정보 당국의 예측을 인용하여 미국 경제의 숨통을 쥔 중동 석유 의존도를 줄이려는 미국정부의 고민에 대해 다각적으로 분석하면서도 ‘셰일 석유’ 또는 ‘셰일 가스’란 말은 한마디도 올리지 않았다. 셰일 석유의 잠재력을 미국 전문가들도 10년 전에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미국의 텍사스를 중심으로 셰일 석유 생산 붐이 불붙고 있다. 1975년 이후 40년간 시행되어온 원유금수조치가 올해 사실상 풀렸다. 3년 안에 미국 산유량은 사우디와 러시아를 앞설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셰일혁명으로 ‘석유 권력’은 중동 산유국에서 미국으로 이동하고 있다. 미국의 공급 능력이 입증되자 석유 값이 떨어지면서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방어적 감산 조치도 할 수 없는 자중지란에 빠졌다. 텍사스 라이스 대학의 석유전문가 에이미 재프의 지적대로 ‘OPEC은 종이호랑이’로 전락하는 중이다.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는 유가 하락으로 재정 파탄에 직면하고 있다.
셰일혁명에 의한 국제 석유수급질서의 재편은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한국에게 퍽 다행스런 일이다. 변덕스런 중동 정세에 의한 가격 변동에 영향을 덜 받을 것이다.
한국은 지금 벌어지는 유가 하락의 여유를 ‘에너지 100년 대계’를 세우는 계기로 삼고 뼈아프게 고민해야 할 때다. 흥청망청 에너지 사치를 구가할 때가 아니란 얘기다.
모든 나라가 에너지 문제를 놓고 고민이 깊지만 한국은 더 심각하다. 한국의 땅속엔 아직 셰일 석유마저 없다. 결국 전통적 석유든, 셰일 석유든, 핵연료든 해외에서 들여와야 한다.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 OPEC이 언제 반격에 나설지 모른다. 또 셰일 석유 채굴은 지하수 오염 등 환경 문제를 야기한다. 셰일 석유도 화석 연료이며 온실기체를 발생한다. 인류 문명의 공멸을 부를 기후변화 문제에 직면하여 셰일 석유는 근원적 해결책이 못된다. 세계 10대 석유 소비국으로서 책임을 점점 더 질 수밖에 없다. 미국은 석유 권력을 무기로 이산화탄소 배출 규제에서 외교적 힘을 행사하려 할 것이다.
원자력은 위험한 대안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입증되었다시피 가동 원자로는 일종의 잠재적 핵폭탄이다. 한 번의 치명적 사고로 나라가 마비된다. 핵폐기물과 폐쇄된 원전은 수천 또는 수만 년을 격리해야 할 골치 아픈 존재다. 얼마 전 삼척시 주민들의 원전설치 주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가 반대편에 섰다. 원전 만들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에너지원의 배합(MIX) 정책을 장기적 차원에서 지혜롭게 세워야 한다. 당분간 화석 연료와 원자력이 주축이 되겠지만 미래를 향해 태양광, 풍력, 지열, 조력 등 재생 에너지의 역할을 최대한 늘려야 한다. 에너지 효율을 위한 기술개발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보다 경제력(GDP)이 거의 3배인 독일은 석유 소비가 하루 240만 배럴인데, 한국은 230만 배럴이다. 이 수치를 놓고 반성해야 한다.
누가 미래를 위한 에너지원 배합 정책을 새로 쓸 것인가? 정부 관료는 타성 상 이런 창조적 일을 할 책임과 비전을 갖지 못한다. 더구나 유가가 떨어지는 판에. 임기를 뛰어넘어 미래를 고민하는 대통령이 손댈 일이다. 여유 있을 때, 하기 귀찮지만 미래에 필요한 일을 하는 게 유비무환(有備無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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