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2015-01-05 00:09:17
조현아씨의 ‘땅콩회항’ 스캔들로 대한항공의 이미지와 신뢰성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국내에선 항공사 이름에서 ‘대한’이란 명칭을 빼라는 네티즌들의 비난이 빗발치고, 국제사회에선 ‘땅콩 항공사’란 조롱을 받는 판국이다.
항공사 이미지가 실추되는 것은 대개 항공기 사고 때문일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 일은 다르다. 대한항공 부사장이자 회장의 딸이 객실 승무원의 서비스 행태를 문제 삼아 사무장에게 폭언을 하고 이미 램프로 진입한 비행기를 회항시켜 내리게 하는 오만한 행동이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같은 뉴 미디어를 타고 일파만파로 확산된 경우다. 그 동안 수면 아래 숨겨져 온 재벌가족의 행태가 뉴 미디어를 만난 것이다.
한국의 재벌이 거의 그렇듯 대한항공도 황제 경영의 DNA를 타고난 회사다. 창업자 고(故) 조중훈 회장은 선원 출신으로 1945년 중고 트럭 1대로 ‘한진상사’란 운수회사를 만들었다. 그가 196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반강제 권유로 부실 공기업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한 후 혼신을 다해 발전시킨 것이 오늘의 대한항공이다.
땅콩회항 스캔들의 파장을 보며 문득 30여 년 전 김포공항에서 벌어졌던 창업자 조중훈 회장의 점보기 고사(告祀) 해프닝이 떠오른다.
1980년대 초반 대한항공은 한창 국제노선을 확장하던 시기였고, 김포공항 곳곳에는 당시 최첨단 항공기로 불리던 보잉747 점보기가 계류하고 있었다. 조중훈 사장은 음력 초하루 날 새벽이면 점보기 앞에서 은밀히 고사를 지냈다. 자동차나 배 등 운송기관의 업주들이 초하루와 보름날에 고사를 지내는 것은 그때 흔한 풍습이었지만 점보 비행기 앞에 돼지 머리 고사 상을 차려놓고 한국 유일의 항공사 최고 경영자가 절을 하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흥미로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이 기자들의 안테나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넓은 공항, 그것도 여명에 어디서 고사를 지내는지를 찾기란 어려웠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다가 셔터를 누르면 되는 시대도 아니었고 확인되지 않는 소문을 카카오톡에 내보낼 수도 없던 때였다.
항공사측은 기자들의 취재 낌새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고사 장면이 들키는 것이 불길한 징조로 볼 수도 있거니와 현장 사진이 신문에라도 나가면 “비행기 안전을 미신에 의존한다.”는 시중의 가십으로 시끄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대항항공의 홍보 담당자는 기자실에 나타나 고사 얘기는 취재하지 말아달라고 읍소했다. 외국 사람이 기사를 보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국가 체면론도 내세웠다.
기자들은 “점보기가 하늘을 나는 첨단 기술 시대에 항공사 사장이 고사를 지내는 게 말이 되느냐.”고 꼬집었다. 홍보담당자가 얼굴을 붉히며 반박했다. “여러분, 대한항공 비행기는 24시간 하늘 어딘가에 떠 있소. 우리 사장님이 밤엔들 깊은 잠이 들것 같소? 전화벨 소리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단 말입니다. 조그만 고기잡이 배 사공도 초하루와 보름에 고사를 지냅니다. 항공사 사장도 운수업자란 말이에요. 비행기 고사는 그냥 눈감아 달란 말입니다.”
1980년경에는 전 세계적으로 항공기 사고가 많았고, 특히 대한항공은 그 악명이 높을 때였다. 고사보다 비행기 정비를 잘하고 유능한 조종사와 승무원을 만드는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대형 항공기를 부리는 사람에게 과학과 기술로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구석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항공기 사고는 그 피해의 끔찍함과 국제적 파장이 상상을 초월한다. 조중훈 회장은 갖가지 곡절과 역경, 비난과 칭찬을 겪으면서 대한항공을 국제적 항공사로 키워냈다.
재벌 창업자에겐 주인 의식이 남다르게 강할 수밖에 없다. 내가 만들었고, 내가 키웠으니 내 것이라는 생각이다. 주인 의식은 바로 황제경영의 씨앗이다. 사원들에게 큰 소리치고 거칠게 대하는 창업자의 황제 경영에 종업원들이 나름 순응하는 것은 창업자의 경영 스타일에 익숙해지고 회사를 성장시키면서 형성되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 3세의 재벌 후계자는 종업원과 그런 공감대가 형성되기 어렵다. 창업자와 달리 그들은 낙하산처럼 투하되어 부와 권력을 누린다고 종업원들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벌들이 젊은 아들딸들을 젊은 나이에 경영에 참여하게 하고, 언론은 경영수업 운운하며 그들의 우수함을 칭찬해왔지만 결과는 이번 사태에서 드러난 대로다.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은 사건이 확대되자 국민 앞에 나서 사과하면서 “딸을 잘못 키웠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서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현아의 동생이자 대한항공 전무인 조현민씨의 ‘복수하겠다.”는 문자를 보면서 과연 대한항공 재벌 자녀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항공사를 경영할 수 있는 경영능력과 품격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그리고 불안하다. 다른 상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수만 명의 생명을 태우고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를 관리하는 재벌 가족이 이렇게 뒷골목 깡패 세계 같은 치기어린 정신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 비행기를 어떻게 안심하고 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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