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2014-08-04 23:38:11
휴가철이 되면서 인천공항, 김포공항, 제주공항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사실 이들 세 곳 공항에 연중 승객들이 붐비는 것을 보면 휴가철이 따로 없다. 확실한 숫자는 모르지만 독자가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한국인 수천 명이 비행기 속에 앉아 있을 것이다.
기장은 기내 방송을 통해 말한다. “저는 00공항까지 여러분을 안전하게 모실 기장 OOO입니다.” 기장의 목소리야말로 승객들에게는 안심(安心) 메시지다. 그러나 근래 잇따라 일어난 치명적인 비행기 사고, 특히 미사일에 의한 여객기 격추 뉴스를 접하면서 기장의 목소리가가 담보하는 비행기의 안전은 ‘착륙할 때까지’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상반기(1~6월)에 한국의 하늘을 날아다닌 항공기 숫자는 30만 1,381대라고 한다. 한국의 공항을 이용해 이착륙한 항공기는 국제선이 17만7,934대이고, 국내선이 10만4,011대다. 그저 단순히 한국의 영공만 통과한 비행기도 1만9,438대다. 하루 평균 1,700대의 비행기가 한국의 좁은 영공을 가로세로 지르며 비행한다. 이들 비행기들이 부딪치지 않고 안전하게 항로를 찾도록 하는 관제시스템이 신기롭다.
눈을 세계의 하늘로 돌려보자. 헬리콥터를 포함하여 전 세계에서 운항되는 유인(有人) 항공기는 약 36만대로 알려져 있다. 이 중 20만 9,000대가 미국 국적의 비행기다. 해마다 약 2,200대의 새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중국, 인도, 브라질 같은 인구 대국의 경제성장은 급속한 항공 교통의 확산을 가져올 것이다. 비행기 운항 회수가 많아지면 항공기 사고가 발생할 개연성도 높아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작년 7월 탑승자 307명을 태운 아시아나 소속 보잉777기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착륙하다 불길에 휩싸였다. 희생자는 2명에 불과했으나 휴가철 한국인들에겐 악몽의 항공 사고였다. 그렇지만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언론은 작년이 1945년 이래 최고의 항공안전 기록을 세운 일 년이었다고 대서특필했다. 세계적으로 사고 23건에 사망자는 475명이었다.
전문가들은 항공 안전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비행기와 엔진 성능이 괄목하게 좋아진데다, 항법 기술 및 경보 시스템의 발달로 기상악화에도 보다 안전하게 이착륙할 수 있다. 또한 관제사, 조종사 그리고 항공사가 예전보다 훨씬 광범하게 운항 장애 요인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안전 기록을 저주라도 하듯 올해 치명적인 비행기 사고가 연달아 터지고 있다. 3월 8일에 239명의 탑승자를 태운 말레이시아항공 보잉777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7월 17일에는 또 다른 말레이시아항공 보잉777기가 우크라이나 분쟁지역 11,000미터 상공을 순항하다가 미사일 공격을 받고 산산조각이 나면서 탑승자 298명 전원이 몰사했다. 7월 23일에는 대만 펑후(澎湖)섬의 마궁(馬公)공항에 착륙하던 푸싱항공 소속 여객기가 악천후 속에 무리한 착륙을 시도하다 추락하여 48명의 인명희생을 불렀다. 7월 24일엔 알제리항공 여객기가 아프리카 서부 부르키나파소에서 추락해 탑승객 116명 전원이 사망했다. 이 4건의 항공기 사고로 991명이 사망하여 작년 항공 사고 인명 피해의 두 배가 넘었다.
비행기 사고는 터지고 나면 안전에 대한 신뢰가 허망하게 꺼져버린다. 올해는 더욱 그렇다. 특히 우크라이나 분쟁지역 상공에서 일어난 민간 여객기의 미사일 피격 사건은 항공 안전에 또 하나 위협적인 존재가 등장했음을 알려준다. 성격은 다르지만 2001년 뉴욕 무역센터를 비행기로 폭파한 9‧11테러 사건의 악몽을 상기시킨다.
미사일 피격 사건은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의 분쟁과 긴장만 가열시킬 뿐, 진상조사도 난항이고 재발방지를 위한 국제적 논의도 별 진전을 못 볼 전망이다. 중견국가로 평가 받아온 두 피해 당사국인 말레이시아나 네덜란드는 무력한 방관자의 처지다.
기술 발전으로 비행기 자체는 좀 더 안전해졌는지 모르지만 세계의 하늘은 오히려 불안해지고 있다. 반군이 미사일로 민간 여객기를 격추시키는 세상이 되었으니, 국경을 초월한 세계의 하늘 길에 이처럼 황당한 일이 어디 있을까.
항로가 위험한 지역은 우크라이나 분쟁 지역만이 아니다. 가장 첨예하게 미사일이 하늘을 겨누고 있는 곳이 한반도 주변 상공이다. 한국은 이미 30여 년 전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으로 269명을 태운 대한항공 007기가 사할린 상공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린 참극을 경험했다.
최근 터진 여러 유형의 항공기 사고는 큰 교훈을 준다. 항공 안전과 관련해서는 ‘마(摩)의 11분’이란 말이 있다. ‘이륙 후 3분과 착륙 전 8분 동안’에 항공기 사고 발생이 집중되기 때문에 나온 통계적 경구다. 하지만 순항하던 비행기가 실종되거나 미사일에 맞아 떨어지는 판국에 비행기의 안전은 이제 착륙 순간까지 유보 상태다. 항공사, 조종사, 정부기관이 유기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공군 1호기를 띄울 때와 맞먹는 긴장된 마음가짐을 내려놓지 말아야 할 이유다. 특히 예방적 차원에서 정부의 역할은 한층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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