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2011-02-09 10:40:52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임기를 시작한지 4년이 지났다. 올해 12월 31일로 5년 임기가 끝난다. 그가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선거운동을 할 때는 꽤 일찌감치 국내 언론이 큰 관심을 보였지만, 지금 재선 여부를 앞둔 반 총장에게 별 관심을 두는 것 같지 않다. 어쩌면 그가 재선되는 것보다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게 한국 언론의 구미에는 더 맞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반기문 총장의 임기가 올해 말로 끝난다는 사실은 며칠 전 LA타임스 인터넷판에 난 기사를 보고 새삼 재확인하게 됐다. 짧은 기사였지만 이집트 데모 사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뉘앙스를 풍겼다.
30년 무바라크 독재체제의 퇴진을 요구하는 이집트인들의 시위가 카이로 시내를 뒤덮었을 때 반기문 총장은 유럽을 방문한 자리에서 무바라크 대통령의 즉각적인 하야를 촉구하는 어조의 논평을 냈다. 무바라크를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이집트인들이 시위를 통해 표출한 의사를 존중해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에 이르도록 평화적이고 질서 있는 권력이양 절차를 시작할 때”라고 역설했다.
무바라크 체제로서는 깊은 상처에 소금을 붓는 격이었을 것이다. 유엔은 세계여론의 풍향을 대변하는 국제기구인데, 그 사무총장이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논평을 냈으니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이 논평에 대해 이집트의 압둘라지즈 유엔 대사는 반 총장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시하며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배후를 알아보아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집트 정부가 기분 나빴을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정작 더 큰 문제는 이집트가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 쪽이었다. 이들 두 나라의 유엔 대사가 반 총장을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이집트 데모 사태는 주권국가의 미묘한 내정문제로서 이집트 국민에게 맡겨야 할 일이지 유엔사무총장이 나설 일이 못 된다는 게 이들이 반응이었다.
LA타임스의 기사는 이런 중국과 러시아 대사의 반응을 반기문 총장의 재선 문제와 넌지시 연결해 놓았다. 반 총장의 재선을 위해서는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 5개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행사가 없어야 하는데, 이집트 사태에 대해 중국과 러시아를 건드리는 발언을 해서 거부권을 행사할지도 모른다는 해석을 깔았다.
아랍 세계는 거대한 정치 문화권을 형성하여 국제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전통적으로 친 러시아와 반미 노선을 걸으며 3각 관계의 균형을 유지해왔다. 아랍의 권력자들은 국내에서는 철권을 휘두르고 국제관계에서는 강대국을 교묘히 이용한다. 아랍세계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위치, 석유자원, 그리고 이스라엘의 존재로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세계의 화약고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지역은 정치 지도자나 외교관들의 출세 길과 무덤길이 교차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평화를 유지하지 못하면 세계가 조용하지 못하다. 평화를 파괴한 사람들이 다시 평화협정을 만들어서 악수하고 노벨평화상을 받아가는 아이러니가 생겨나는 곳이다. 이런 환경의 중동과 아랍세계에서 유엔사무총장은 샌드위치의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이집트 사태는 아래로부터 일어난 메가톤급 정변이다. 미국에게 이집트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아랍의 맹주로서 역할이 크고, 이집트 정권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 넘어가면 사우디 왕국이 불안해지고 이스라엘이 위험해진다. 이런 도미노 현상은 미국에게 최악의 시나리오여서 민주화 시위와 무바라크의 철권통치 사이에서 미국정부의 태도가 우왕좌왕했던 것이다.
중국이나 러시아도 이집트 사태의 진전에 우려를 가질 수밖에 없다. 중국은 이집트 정권이 대중시위에 의해 무너지는 모습도 보기를 원치 않을 것이고, 이런 혼란을 틈타 미국이 아랍세계에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것도 싫을 것이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친 러시아 편에 서 온 이집트와의 관계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반 총장의 재선가도에 이집트사태에 대한 그의 논평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다. 투표로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 정부와 국민이 반기문 사무총장 재선에 관심을 가질 때인 것 같다. 5년 연임하는 사무총장이 한국에게 줄 경험과 파급효과는 그가 자리를 떠나야 알게 될 것이다. 한국 사람이 사무총장이 되는 일은 금세기에 다시 못 볼 것이므로.
'내일신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다피와 한니발 (0) | 2022.11.08 |
---|---|
SNS와 아랍 민주화 (0) | 2022.11.08 |
기본을 생각하자 (0) | 2022.11.08 |
고기 좀 덜 먹읍시다 (0) | 2022.11.08 |
로카쇼무라에서 느끼는 일본 (0) | 2022.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