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기본을 생각하자

구상낭 2022. 11. 8. 12:38

내일신문 2011-01-28 23:51:23

무슨 일을 하다가 뭔가 막히고 잘 풀리지 않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그 한 가지 방법은 기본으로 돌아가거나, 또는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얼마 전 미국 하원에서 벌어진 헌법 낭독은 흥미롭고 의미 있어 보인다. 미국 의회는 하원의 임기에 맞춰 매 2년마다 새로운 의회를 구성하는 데, 지난 1월 5일 112회 의회가 열렸고 그 이튿날 의사당에서 하원 의원들이 헌법 전문(全文)을 돌아가며 낭독하는 이벤트가 벌어졌다. 미국 역사상 없었던 일이라 한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유튜브(YouTube)로 그 장면을 보았다. 새로 선출된 공화당의 존 배너 하원의장이 헌번 전문(前文)을 읽자 전임 의장 낸시 펠로시 민주당 의원이 헌법 1조를 읽었다. 그 다음부터는 낭독을 하고 싶은 여야 의원이 발언대에 나와서 한 조문씩 읽고 들어가는 식이었다. 미국 헌법은 약 4,500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방식으로 135명이 등단해서 헌법을 다 읽는 데 무려 90분이 걸렸다고 한다. 시를 낭송하는 것도 아니라 딱딱한 헌법 조문을 읽었으니 의원들 자신이나 방청객이나 또는 텔레비전에서 시청하는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 이벤트 계획을 놓고 말이 많았다. 헌법 낭송을 제안한 사람은 공화당의 로버트 굿래트 하원의원이라고 한다. 그는 이런 제안을 하게 된 이유를 “의회가 헌법에 의해 부여된 권한을 넘어서고 있다는 선거구 유권자들의 불평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의정활동이란 게 모두 정치적 논쟁이 있게 마련이어서, 헌법 낭독을 조율하는 데 여야 간에 옥신각신 말이 많았다고 한다. 미국 헌법은 한국 헌법과 달리 수정헌법 체계이다. 시대에 맞춰 개정되면 새 조항을 뒤에 붙이고 사문화된 조항을 그대로 둔다. 그래서 헌법 제정 당시 흑인 노예제도와 여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는 문구가 화석처럼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사문화된 조항은 이번 낭독 원고에 넣지 않았고, 이 때문에 하원 내에서는 물론 일반 여론도 비판 목소리가 높았다. 사문화된 조항을 낭독하지 않는 것은 역사를 지우는 것이고 헌법낭독의 의미를 반감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원들의 헌법 낭독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헌법 제정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수많은 선거구의 색다른 말투와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흑인과 여성의 목소리가 의사당 안을 울렸다.”고 보도한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그런 정서를 대변한다. 헌법을 낭독한 하원의원들도 가슴이 벅찼던지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느니 “초당적으로 헌법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좋은 출발 방법이다.”라고 소회를 말했다. 시민운동가 출신 흑인 의원이 노예제도를 폐지한 수정헌법 조항을 낭독할 때는 모든 하원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미국인들에게 헌법은 각별하다. 헌법은 살아있는 법의 표상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그의 자서전 ‘담대한 희망’에서 헌법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한다. 그가 상원에 처음 진출했을 때, 1957년 이래 47년간 전설적인 상원의원으로 재직했던 로버드 버드 의원과의 면담을 적은 구절이 인상적이다. 버드 상원의원은 안주머니에서 조그만 책자를 꺼내 오바마 의원에게 보여주며 말한다. “요즘은 헌법을 읽어보는 사람이 거의 없어. 그래서 난 이렇게 강조하지. 내게 필요한 길잡이는 바로 이 책자와 성경뿐이라고.”

 

한 편으로 생각하면 정말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대화 같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하면 정치의 기본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일화 같기도 하다. 미국도 옛날과 달리 21세기 들어서며 여야의 정치적 대립이 심각하다. 그러나 이럴 때 헌법을 읽으며 기본을 생각하는 정신이 살아있다는 것이 신선하게 보인다.

 

미국 하원의 헌법 낭독 이벤트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국가 지도자 급 인사들이 헌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말들을 쏟아낸다. 헌법은 나라의 기본법이다. 우리나라의 환희와 아픔이 녹아 있는 문서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대법원 판사도, 감사원장도 헌법을 지켜야 할 뿐 아니라 헌법정신에 입각해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헌법 전문과 조문을 읽어보면 모두가 좋은 문구요, 그대로만 하면 나라가 잘될 것만 같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정치 상황은 분열적이고 자멸적이며 포악하기까지 하다. 이럴 때 모두가 기본을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 아닐까. 헌법 조문을 읽으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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