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8 11:31:57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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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 칼럼] 에어컨과 '글로벌 보일링'의 악순환
2023-08-08 11:31:57 게재
35℃를 넘나드는 폭염에 숨을 몰아쉬다가 지하철을 타면 얼음창고에 들어간 듯 시원하다. 에어컨이 없다면 서울은 요즘 아마 불지옥과 같을 것이다.
열대 섬 싱가포르는 60년 전만해도 사람들이 야자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며 살던 곳이었다. 그랬던 싱가포르가 부유한 도시국가로 경제성장을 이룩한 건 에어컨 덕이었다. 총리로서 30여년 간 싱가포르를 통치했던 리콴유는 2009년 언론 인터뷰에서 싱가포르 성공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직설적으로 에어컨이라고 대답했다. "에어컨은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다. 에어컨이 열대지역의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문명의 성향을 바꿔 놓았다." 리콴유는 에어컨의 노동생산성에 착안해 관공서와 사무실빌딩에 에어컨 설치 정책을 추진해서 싱가포르를 '에어컨 국가'로 만들었다.
에어컨이 이 세상에 출현한 건 20세기 초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던 미국에서였다. 1901년 미국 동부에 살인적인 폭염이 덮쳤다. 9500명이 열사병으로 사망했다. 객장에서 직원의 엄격한 복장을 강요했던 뉴욕증권시장은 이 폭염사태에 양복 윗저고리를 벗고 일하도록 허용했고, 부랴부랴 냉방 설비를 도입했으나 기술은 정육냉동을 위한 조잡한 수준이었다.
그 당시 뉴욕주 버펄로의 한 철강공장에 근무하던 '윌리스 캐리어'라는 25세의 젊은 엔지니어가 혁신적인 현대 에어컨의 원리를 고안해냈다. 그는 인쇄업자를 도와 일하는 중에 실내 습기 때문에 잉크가 다른 페이지로 번지는 것을 해결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안개가 자욱한 디트로이트역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다 공기가 건조하고 산뜻한 것을 느끼는 순간 천재적 기지가 떠올랐다. 그는 안개의 특질에 착안해 공기를 압축해서 습기와 냉기를 조절하는 방안을 고안해냈다.
철강회사는 캐리어의 아이디어를 완전히 믿지 못해 자회사를 만들어 그를 수석엔지니어에 앉히고 개발을 계속하게 했다. 이 회사가 세계 최초 에어컨 제조사가 됐다.
에너지 사용 확대와 기후악화의 악순환
캐리어는 1921년 대형 공공시설로는 최초로 LA 그라우만극장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등 에어컨 설치를 확대했다. 드디어 1930년 미국 국회의사당의 상원과 하원 회의실과 뉴욕 메디슨스퀘어가든에도 에어컨을 설치함으로써 미국의 에어컨시대는 고층빌딩 건설 붐을 타고 미국은 물론 전세계로 퍼졌다.
에어컨은 2차대전 이후 도시문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과거 여름철에 덥고 습해서 거주지로 부적합했던 미국 남부에 마이애미 애틀랜타 휴스턴 댈러스 샌안토니오 피닉스 등 거대한 선벨트(Sun Belt) 도시붐이 일어난 것은 에어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 미국과 유럽 일본 한국 싱가포르 등 선진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동남아 등 경제발전을 이루는 나라의 에어컨 소비는 천정부지로 늘어나고 있다.
에어컨 확산으로 전력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금 그 전기가 어디서 나오는가. 일부는 원자력과 재생에너지가 담당하지만 대부분 화석연료, 즉 석유 석탄 천연가스 발전에서 나온다. 온실가스를 대량으로 배출하면서.
다시 말해 이렇게 배출된 온실가스로 악화된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인간은 더욱 더 에어컨을 많이 쓰게 되고 그 결과 지구는 온실가스에 의해 더욱 열이 오르기 마련이다. 에어컨이 지구를 덥게 하고 그래서 더 에어컨을 써야하는 악순환을 겪게 된다. 이미 인류는 폭염 적응을 위한 에너지 사용확대와 그에 따른 기후변화의 악화라는 악순환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있는 것 같다.
올해 세계의 권위있는 연구기관이 내놓는 데이터를 보면 구테흐스 유엔사무총장이 말한대로 지구는 '글로벌 보일링(Global Boiling)'의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는 것만 같다. 올 7월 기온은 기록상 가장 더운 달로 기록됐고, 이를 반영하듯 스페인 이태리 그리스 등 남유럽은 산불과 폭염으로 불탔다. 스페인 사람들의 전유물이다시피한 시에스타(낮잠)가 독일인의 피서법으로 생활스타일의 변화를 일으킨다고 한다. 산불이 별로 없던 캐나다 냉대림이 대규모로 소실된 것도 기분나쁜 징후다.
한켠에선 기후변화 완화 행동에 나설 때
한국의 기후변화 속도 역시 심각하다. 깊은 상처를 남긴 장마폭우, 태풍 카눈의 지그재그 진로 등 기상패턴이 예측불허다. 기온상승 못지않게 바다 수온상승이 가파르다. 생태계의 변화가 산림환경과 농작물 재배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올해 유독 동해의 수온이 높아지면서 백상어가 출현했다는 소식은 40여 년 전 영화 '조스'를 떠올리게 하지만 바닷가 사람들에게는 생사가 걸린 바다 생태계의 대변화를 의미한다.
현실 문제를 타개해야 하는 대통령은 시민들이 덥다고 호소하면 급한 대로 에어컨을 공급하라고 지시한다. 그건 부득이 한 일이라도 정부의 한켠에서는 기후변화 완화에 필요한 행동을 구체적으로 기획하고 교육하고 실행하는 행동에 나설 때다. 그게 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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