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01 11:47:50 게재
허리케인 '하비'의 강타로 미국 텍사스 주는 아수라장이다. 그런데 정작 태풍 피해 뉴스 못지않게 '스틸레토(stilleto)' 논쟁이 미국의 신문과 SNS를 달궜다.
'스틸레토'란 단어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사전을 찾아보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영어로 'stiletto'는 굽이 뾰족한 여성용 하이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유행한 킬힐을 말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부인 멜라니아가 남편과 텍사스주 재난 지역으로 방문하면서 신었던 바늘 모양의 높은 굽을 가진 하이힐이다.
모델 출신인 멜라니아에게 킬힐은 퍼스트레이디가 되기 전부터 즐겼던 패션이다. 그런데 레드카펫을 깐 연회장이 아니라 수만명이 불행에 처한 참혹한 재난지역을 방문하면서 굽 높이 5인치(약 13㎝)나 되는 킬힐을 신었으니 패션에 관대한 미국사람들조차 잠잠할 리가 없다. 텔레비전 등 뉴스에서 멜라니아의 킬힐 패션을 본 사람들이 소셜미디아에 비난과 야유를 쏟아냈다.
3시간 후 텍사스 허리케인 피해현장에 도착한 비행기에서 내린 멜라니아는 킬힐이 아닌 하얀 운동화으로 바꿔 신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번 구겨진 인상은 회복하기 힘든 법, 이번엔 멜라니아가 쓴 까만 야구모자에 입방아가 쏟아졌다. 모자에 하얀 색으로 'FLOTUS'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First Lady Of The United States'의 이니셜이니, 풀어보면 '미합중국대통령영부인'이란 뜻이다. 엘리트 노출욕에 대한 비아냥거림 같은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허리케인 재난이 확대되자 텍사스와 루이지애나 2개 주에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재난지역을 방문했다. 나름 신속한 대처였다. 하지만 허리케인 '하비'는 풍속만 약해진 채 열대성 저기압으로 텍사스 일대를 돌면서 폭우를 퍼붓고 있다. 이제 트럼프에 대한 비판은 기후변화와 관련해 쏟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파리기후협정을 탈퇴하고 기후변화 정책을 후퇴시키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노선에 대한 여론의 질타가 곧 제기될 것이다.
1320mm 물폭탄으로 변한 허리케인
새니 번디스 같은 상원의원은 재난구조가 끝나면 기후변화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나섰고, 공화당 진영은 "또 상투적인 수법을 쓴다"며 반격했다.
휴스턴을 강타한 '하비'는 카테고리4의 태풍으로 시속 207㎞ 풍속으로 1320㎜의 물 폭탄을 쏟아부었다. 한국에서 1년 동안 내리는 강수량과 맞먹는 비가 사나흘에 쏟아진 것이다. 한국교포도 대거 거주하는 휴스턴의 메트로 인구는 약 600만명으로 미국 5대 도시다. 확인된 인명피해는 30여명이지만 평평한 도시 지역이 물에 잠기면서 주택에 갇혀 구조를 요청하는 시민이 수천명에 이르고 있으니 인명피해가 늘어날 게 분명하다. 휴스턴은 세계 제일의 에너지 관련 산업시설이 밀집되어 있다. 석유산업 시설 15%가 가동을 멈췄고 유가 등 세계 경제에 미칠 영향도 클 것이다.
12년 전 허리케인 카트리나 상륙 때보다는 기후와 기상에 대한 보다 정확한 데이터가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향후 태풍과 기후변화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결과가 쏟아질 것이다. 미국 내 기후변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기후변화가 '하비'를 일으킨 원인은 아니지만 이 태풍의 위력을 증폭시킨 것은 기후변화라고 입을 모은다. 멕시코만의 수온이 예년보다 섭씨 2도 이상 높아져서 대량으로 발생한 공기 속 수증기가 허리케인 하비에 에너지를 공급했다는 것이다.
허리케인 하비의 특징은 휩쓸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열대저기압으로 변한 채 계속 휴스턴 상공 일대를 선회하면서 폭우를 쏟아 붓는 이상현상을 보였다는 점이다. 하비의 강수량 1320㎜는 미국기상청의 평가에 의하면 500년 주기의 기록이다. 500년에 한번 내릴까 말까한 기록의 비다.
요즘 서늘한 기온과 제트기류
왜 태풍이 이동해서 소멸하지 않고 텍사스 상공에 계속 머무는 것인가. 미국 코넬대학의 찰스 그린 지구대기과학 교수의 설명이 주목을 끈다. 북극해의 기온이 상승하면서 그린란드와 북극해의 만년설이 녹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극의 이런 변화가 북반구 상공을 흐르는 제트기류를 약화시키고, 그 결과 태풍이 멕시코만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살인적인 폭우를 한곳에 내리게 했다는 설명이다.
제트기류는 한반도를 포함한 북반구 상공을 흘러간다. 올해 6월과 7월의 우리나라 무더위에 대한 설명으로 북극권의 기상변화가 자주 거론되었다. 이렇게 보면, 하비는 먼 나라 태풍이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 기후변화와 연결이 되어 있다는 얘기도 되니, 요즘 서늘한 날씨가 매우 수상쩍다.
트럼프 대통령이나 멜라니아 여사는 재난이 생겨도 뉴욕의 트럼프타워로 대피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일반 시민은 어딘가로 피해 달아날 수가 없다. 그게 공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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