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2010-10-10 20:35:34
배추 값 폭등이 몰고 온 파장이 크다. 국회 국정 감사장에서 국회의원이 책상 위에 배추를 올려놓고 정부를 상대로 가격폭등을 추궁하는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오른다. 정부는 ‘배추값 안정화 대책’을 발표하고 중국산 포기 배추를 대량으로 긴급 수입한다. 그나마 중국 배추가 안전판 역할을 한다.
배추 값 파동을 보고 이명박 대통령이 식탁에 양배추 김치를 올리라고 얘기한 것이 뉴스를 통해 알려지자 네티즌들의 힐난이 쏟아졌다. 나름 국민이 알아줄 것이라고 해서 보도하도록 청와대 홍보팀이 아이디어를 짜낸 것 같은데 불난 집에 부채질한 셈이 되었다.
배추 값 폭등의 원인을 놓고도 천재(天災)냐 인재(人災)냐 하며 설왕설래다. 일부 환경론자들이 4대강 사업이 그 원인이라고 주장하자 야당 의원들이 원군을 만난 듯이 가세했다. 정부 당국자는 기상 이변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청와대 비서실장은 유통업자의 매점매석이 값을 올려놨다고 주장한다.
무엇이 배추 값을 폭등하게 만들었을까? 객관적으로 조사하면 답이 쉽게 나올 문제 같다. 기상이변, 유통업자의 매점매석, 또는 4대강 사업 중 어느 것에 핵심적 책임을 물어야 할지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공방으로 신문이 도배되고 방송이 난무하다 보니 원인을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해결책을 모색할 분위기는 형성되지 않는다.
내가 아는 경기도의 한 농민은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인데 “왜 온 나라가 이렇게 호들갑떠는지 모르겠다. 지난 여름 계속된 폭염과 폭우로 농업 현장에선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 아니냐. 4대 강 타령은 아닌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농산물 시장에선 물자가 조그만 모자라도 가격은 폭등하고 조그만 남아돌아도 가격은 폭락한다. 그러니 매점매석이나 4대강 사업도 정도가 문제지 배추 값 폭등과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그렇더라도 핵심적 원인은 기상이변에 따른 배추흉작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날씨가 좋아 배추 풍년이 들었다면 매점매석이나 4대강 사업도 끼어들 틈이 없었을 것이다.
이번 배추 값 폭등이 어쩌다 한 번 찾아온 단순한 기상이변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기후 변화의 한 복판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생긴 일인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소슬바람 한 줄기에 불과 한 달 전의 일을 다 잊어버린 듯하다. 아직 공식 기록이 나오지 않았지만 지난 여름의 폭염은 유난스러웠고, 비는 그칠 줄을 몰랐으며, 태풍이 서울을 관통했다. 광화문 광장을 물바다로 만든 기습적인 폭우가 ‘맑고 구름 한 점 없다’는 추석 즈음해서 일어났다.
포악한 날씨가 계속되면 사람들은, 특히 도시 사람들은 보통 홍수와 폭풍 같이 단 시간에 일어나는 재난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기상이변 뒤에는 생태계의 변화가 일어나고 농작물 작황에 크게 영향을 준다. 올 여름 폭염은 서늘한 날씨를 좋아하는 배추가 자라기에 악조건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기후 변화를 미래에 다가올 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기후 변화는 이미 한반도 깊숙이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불과 보름 전에 쏟아진 서울 폭우는 기후변화의 차원에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서울 강서구 지역엔 시간당 93㎜의 비가 내렸고 하루 동안 무려 269㎜가 쏟아졌다. 기상관측이 시행된 이래 없었던 기록이라고 한다. 이에 앞서 9월 2일 새벽엔 태풍 ‘콤파스’가 인천과 서울을 강타했다. 서울에 이런 가을 폭우가 쏟아진 적도 없고, 태풍은 중남부 지방을 쳤지 이렇게 깊숙이 경인지방을 건드린 적이 없다.
기상이변이라면 한 번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말지만, 기후변화가 원인이라면 앞으로 서울은 이런 포악한 기상현상을 수시로 맞게 될 것이다. 2002년 강릉을 강타했던 태풍 ‘루사’가 몰고 왔던 강수량은 하루 870㎜이었다. 서울에 이런 비가 오지 말란 법은 없다. 올해는 배추 값을 걱정했지만 내년엔 사람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재난이 우리에게 다가올지 모른다. 물바다가 되었던 광화문 네거리의 모습은 기후 변화의 경고로 받아들이는 게 현명할 것 같다.
'내일신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카쇼무라에서 느끼는 일본 (0) | 2022.11.08 |
---|---|
자원부국의 시대 (0) | 2022.11.08 |
중국은 군사 초강대국으로 간다 (0) | 2022.11.08 |
리튬 전쟁 (0) | 2022.11.08 |
Globish가 뜬다는데 (1) | 2022.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