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2014-01-02 20:37:17
뉴욕은 지리적으로 서울의 정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지만 세계 어느 대도시보다 서울 시민들에겐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다.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는 월스트리트가 있고, 서울 젊은이들이 동경하는 브로드웨이가 있다. 세계 모든 인종이 섞여 살고 유엔본부가 있는 코스모폴리스이다. 뉴욕은 한국인 수십만 명이 살고 있는 곳으로 서울과 하루 여러 편의 비행기로 연결되어 있어 더욱 이웃 도시처럼 여겨진다.
뉴욕에서 일어나는 일은 서울 시민에게 쉽게 관심사로 떠오른다. 특히 뉴욕 시장에 누가 당선되고 어떤 일을 하는지는 웬만한 나라의 대통령보다 더 관심을 끈다.
2013년 마지막 날 뉴욕타임스가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다. 12년의 재직기간을 마감하고 퇴임하는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이 '시장 노릇 하는데 개인 돈 6억5천만 달러를 썼다'는 이야기였다. 요즘 1달러의 값이 1천원이 약간 넘으니 약 6천500억 원을 뉴욕시장 12년 하면서 쓴 셈이다. 얼마나 비상식적인가.
그런데 블룸버그는 시장으로서 연봉을 1달러만 받았다. 그가 시장 재직 중 시로부터 받은 보수는 12달러다. 제대로 봉급을 챙겼다면 270만 달러나 되는 거액이었을 것이다. 이것도 이만저만한 비상식이 아니다.
뉴욕타임스는 이런 블룸버그 시장의 행태를 일컬어 "과거에 뉴욕시는 시장에게 보수를 지급했는데, 블룸버그는 시장이 되기 위해 돈을 지급했다."고 평가했다.
블룸버그 시장은 약 6억5,000만 달러에 이르는 개인 돈을 어디다 썼을까.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기사를 시작한다. "블룸버그는 열대어를 극진히 좋아한다. 시장으로 당선되자 뉴욕시 청사 안에 대형 수족관 2개를 설치했다. 12년간에 걸쳐 매주 수족관 청소를 하는데 들어간 비용이 6만2,400달러였다."
블룸버그 시장은 시장실 직원들에게 간식비로 12년간 89만 달러를 썼고, 시장 업무수행에 필요한 여행경비도 개인 돈으로 처리했다. 보좌진을 데리고 출장 갈 때도 2천8백만 달러짜리 자신의 비행기를 이용하고 거액의 개인 돈을 썼다. 그는 시장공관을 보수하는 데 사비 5백만 달러를 들여놓고도 자신은 정작 그곳에 살지 않고 개인 집에 거주했다.
블룸버그가 돈을 가장 많이 쓴 곳은 선거다. 그는 3차례 시장 선거를 치르면서 무려 2억 6천8백만 달러를 썼다. 블룸버그는 돈을 무기로 선거에서 이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건 세계 모든 부자 정치인이 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블룸버그는 공익을 위하여 개인 돈을 대규모로 내놓았다는 것이 독특하다. 블룸버그는 뉴욕의 예술단체, 보건단체, 문화단체 등에 기부금으로 2억6천300만 달러를 내놓았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안내시설을 혁신하는데 3천만 달러를 기증했으며, 흑인과 라틴계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는 프로그램에 3천만 달러를 기부했다.
블룸버그가 이렇게 합법적인 방법으로 12년간 돈을 써대며 시장을 했으니 신나는 사람도 있었고 불편한 사람도 있었다. 신났던 사람은 보좌관들이었고, 화가 부글부글 끓었던 사람은 경쟁하는 시장 후보들이었다. 유권자도 나빠할 이유가 없었다. 돈으로 시장직을 샀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이렇게 자기 돈을 씀으로서 블룸버그는 정치헌금자, 이익집단, 정당의 요구로부터 해방되어 소신대로 일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뉴욕타임스는 장문의 사설에서 그에게 높은 점수를 주었다. 9·11사태로 풍비박산이 난 뉴욕시를 맡아 새로 건설했고, 재앙 수준의 적자재정을 흑자로 바꾸고, 정치적 배려를 배제한 전문 인력을 발탁하여 뉴욕을 다시 번창하는 '자유세계의 수도'의 위상으로 지키게 했다는 것이다. 블룸버그는 2008년과 2012년 대통령 후보, 그리고 2010년 뉴욕 주시사 후보 물망에 끊임없이 거론되었으나 상위직으로 올라가기를 바라지 않고 뉴욕 시장 자리를 지켰다.
불룸버그는 러시아계 유태인으로 금융과 미디어산업으로 부를 축적한 억만장자다. 그의 재산은 310억 달러로 미국에서 일곱 번째 부자다. 돈이 있기에 그는 뉴욕시장에 당선되었고, 돈이 있기에 연봉 1원을 받고 개인 재산을 공익에 쏟아 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돈이 있다고 이렇게 행동하는 정치인은 드물다. 권력과 돈의 관계에 대한 철학과 소신을 뚜렷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12년을 한결같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돈을 많이 벌면 선거직 권력에 도전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흔한 일이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돈 가진 사람들이 선거에 이기고 정치를 하는 것을 보면 실망스럽다. 대부분의 부자 정치인들은 선거자금을 펑펑 쓰고 당선되면 국가나 공공예산으로 일을 하며 생색을 내기 일쑤다. 권력을 자신의 부의 방패막이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권력을 잡았을 때 자신의 돈을 블룸버그처럼 공익에 조건 없이 던지는 대통령후보, 국회의원후보, 시장후보를 좀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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