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2014-01-15 20:42:10
15년 전쯤 일이다. 중소기업 사장들로 구성된 어느 민간단체가 주한 미국대사관의 고위 외교관을 연사로 초청했다. 한미 관계를 주제로 한 강연이 끝난 후 나온 질문 중에 '유별난' 내용이 있었다. “앞으로 중국이 경제 대국이 되어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 서면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느 편을 들어야 할까요?”
이 질문이 나오자 청중석에서 폭소가 쏟아졌다. 웃음이 터진 이유는 강연회 청중들의 귀에 그 질문이 현실에서 동떨어진 '유별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이 현실적으로 미국과 맞먹는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웃음 속에 묻혀 나온 미국 외교관의 대답은 정말 외교적이었다. "한국의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미중 관계를 만들어야지요."
요즘 평범한 시민들도 중국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중국 전문가도 아니고 중국에 생계가 달린 직업에 종사하는 것도 아닌데, 왜 중국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까. 이유는 중국의 영향력을 느끼지 않고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변화 때문이다. 어느 날 중국서 날아온 미세먼지가 공포감을 느낄 정도로 서울 하늘을 덮는다. 센카쿠열도 영유권을 놓고 일본과 티격태격하던 중국이 센카쿠열도와 이어도를 포함하는 동중국해를 방공식별구역으로 선포하자 한 순간 미·중 간 긴장이 고조되었다. 냉전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느낀다.
중국은 몸집만 커진 게 아니라 마음도 변해가고 있다. 문화대혁명으로 피폐되고 굶주림에 허덕이던 13억 인구 대국이 제2의 경제 대국으로 변신한 것은 1979년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 개방정책을 표방하고 나선 지 30년만이다. 30년 전 미국 LA타임스는 인구 10억 중국의 구매력을 인구 1천만 명의 스위스의 구매력 수준이라고 보도한 적이 있다. 이제 중국은 국민생산(GDP)규모에서 이미 일본을 제쳤고, 앞으로 10년 내에 미국을 추월할 전망이다.
개인의 경우 돈이 있으면 부만 향유하지 않고 권력을 추구하듯 국가도 돈이 생기면 국민의 복지도 챙기지만 근육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중국의 군사력 증강은 미국을 쫓아가고 있다. 항공모함 랴오닝호를 실전배치하고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다. 등소평은 ‘빛을 감추고 은밀히 힘을 길러야 한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중국을 원했다. 그러나 시진핑(習近平)은 ‘해야 할 일을 주도적으로 한다’는 주동작위(主動作爲)의 중국을 주장한다.
시진핑의 대외 정책의 핵심은 '신형대국관계'이다. 그 요지는 미국과 중국이 상호 핵심 이익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핵심 이익은 대만을 포함한 동중국해의 제해권과 서태평양으로의 세력 확장이 아닐까. 대륙 깊은 곳에서 잠자던 잠룡(潛龍)이 태평양을 향해 몸을 털고 일어서는 형국이다. 미국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
40년 전 비밀외교로 미․중 수교를 텄던 헨리키신저 박사의 2011년 저서 ‘중국 이야기’(On China)는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키신저는 지금 중국의 부상(浮上)으로 야기된 미중관계를 100년 전 독일의 해군력 팽창으로 형성된 영독(英獨)관계에 비유하며 역사의 반복 가능성을 제기했다.
1907년 1월 1일 영국 외교관 에어 크로우는 독일의 위협을 분석한 비망록을 외교부에 제출했다. 비망록의 요지는 해군력 증강에 의한 독일의 팽창은 독일의 해명이 무엇이든지간에 영국에 위협이 된다는 경고였다. 7년 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함으로써 크로우 비망록은 그 후 역사적인 교훈으로 인정받고 있다.
키신저는 크로우의 비망록을 미국 신보수주의 버전으로 이렇게 설명한다. 중국의 의도가 무엇이든 중국의 성공적인 부상이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과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형태의 협력도 중국에게 능력을 키울 공간만 허락해서 위기를 키울 것이다. 한편 중국의 승리주의자들의 버전도 비슷하다. 중국이 아무리 평화적인 접근을 공약해도 미중관계는 갈등이 내재되어 있으므로, 이 경쟁은 제로섬 게임이고 완전한 승리 또는 굴욕적인 패배가 있을 뿐이다. 이들 양측의 극단적인 주장이 먹혀들어 미중관계가 냉전으로 치달으면 태평양 양안의 발전은 1세대 동안 중단된다는 게 키신저의 생각이다.
미중관계에 대한 키신저의 예측은 일종의 세력균형이다. 미국이 중국을 억지하기 위해 민주국가 블록으로 아시아의 판을 짜려고 계획하면 실패할 것이다. 주변국이 교역 파트너인 중국의 고립을 절대 원치 않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이 아시아의 경제문제나 안보문제에서 미국을 제외시키려 한다면 주변 아시아 국가의 저항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중국이 혼자 아시아를 지배하는 사태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고래싸움이 무섭지만 고래가 함부로 싸울 수는 없다.
키신저의 예측에 동의한다면 한국의 균형자적 역할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부강한 경제력과 국민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는 지도력이 결합해야만 이 격랑을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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