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2011-06-20 18:49:41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의 여파로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가 발생한지 석 달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당사국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 여러 나라가 원자력 에너지 정책을 놓고 한바탕 홍역을 치렀습니다. 특히 원자력발전소의 밀집도가 높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등 유럽 국가들의 논쟁이 뜨거웠습니다.
가장 최근의 일로 이탈리아 국민들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거부했습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중단됐던 원자력발전 사업을 재개하기 위해 베를루스코니 정부가 내놓은 원자력 사업 재개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이탈리아 국민 94%가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우파 정부의 정책 좌절로 사실상 이탈리아는 원자력 확대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혁명적인 조치를 취한 나라는 독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원자력에 비교적 호의적이었던 앙겔라 마르켈 총리가 후쿠시마 사고 후 2022년까지 현존하는 원전을 완전 폐쇄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원자력은 선진 산업국가인 독일 전력수요의 23%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10년 안에 원전을 다 폐쇄하고 그에 상응한 에너지 수요를 풍력과 같은 친환경에너지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니 가히 혁명적이고 또한 벼랑끝 에너지 정책입니다. 그래서 산업계의 반발이 상당하다고 합니다. 그만큼 국제경쟁력이 걱정되는 것이지요.
독일에 이어 스위스도 2034년까지 원전을 완전 폐쇄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프랑스는 독일과 달리 원자력 에너지 정책을 바꿀 의사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원자력은 화석연료의 유일한 대안”이라며 기존의 정책을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프랑스는 전력수요의 80%를 원자력으로 충당할 정도로 원자력 없는 에너지 정책을 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중국은 여론이 없는 나라여서 늘어나는 에너지수요를 원전으로 채울 것이고, 미국과 러시아는 후쿠시마 사고로 놀라기는 했지만 원전 정책에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이 우리의 관심 대상입니다. 아사히신문이 최근 일본 국민 1,98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74%가 원자력발전소를 단계적으로 폐쇄해야 한다고 응답했습니다. 또 “전기요금이 오르더라도 자연 에너지에 의존해야 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64%였습니다. 최초의 핵무기의 피해국이자 후쿠시마 핵 누출 사고의 당사국으로서 받는 충격이 느껴지는 국민 반응입니다. 심각한 에너지 문제를 안고 있는 일본이 핵에너지 정책을 놓고 벌여야 할 고민이 만만치 않습니다.
엊그제 신문 지면에 게재된 흥미로운 사진 두 장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영광 원전 앞바다에서 국제 환경단체인 ‘그린피스’가 지역 환경단체와 연합하여 고무보트를 타고 원전 반대 시위를 하는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리 원전 앞바다에서 (주)한국수력원자력 직원들이 원전 온수에서 키운 치어를 방류하는 행사 사진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조그만 이벤트는 한국의 원전을 둘러싼 잠재적 논란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의 정부와 기업이 바라는 원전 시설 확대가 국내 반대론자만 아니라 해외 여론의 압력을 받을 가능성도 더 커졌다는 암시입니다.
소식에 의하면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이 정기적으로 해오던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국민 여론조사를 못한 채 망설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후쿠시마 원전폭발 사고가 나면서 전 세계적으로 원자력 발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비등하기 때문에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더위가 심해지면 전력에 대한 갈증이 심해지고 그럴 때 여론조사를 하면 아무래도 원자력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완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지금쯤 원자력에 대한 국민의 정서를 한번 측정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후쿠시마 원전의 충격이 일어난 지 석 달이 넘었으니 오히려 여론을 가늠해보기 좋은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부나 산업계는 일본과 한국이 지진 규모와 발생 빈도에서 다르다는 이유로 원자력발전 확대정책을 밀어붙일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정부는 그 동안 녹색성장을 구두선처럼 외쳐왔지만 그 배경에는 재생 에너지를 생각한 것이 아니고 원자력을 염두에 두었던 것입니다.
한국의 원자력 정책에 영향을 미칠 요인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국민 여론이고, 둘째는 국제 여론입니다. 국제적 분위기가 중요한 것은 이것이 국내여론에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심각한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에너지 정책은 전략적 문제였으나 후쿠시마 사고 이후 철학적 문제로 논의의 단계가 상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갈 것이라고 봅니다.
10~20년 안에 원전을 폐쇄한다면 한국은 고통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화석연료에서 대체 에너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원자력의 대체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원자력을 최종적인 대안으로 생각하는 것은 진짜 대안이 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류는 지구상에서 400여기의 원자로를 발전에 쓰고 있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드러났듯이 원자력의 위험성이 생각보다 파멸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또한 사용 후 핵연료의 영구처리 방법을 어느 나라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핵발전소 밀집도가 가장 큰 나라라는 점에서 한국은 기술적 자신감 하나만으로 대처하기에는 뭔가 불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40여년 전 경제학자 E. F. 수마허는 그의 저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원자폭탄보다 에너지로 쓰이는 원자력이 더 위험하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최근 원로 물리학자 장회익 전 서울대 교수가 한 잡지에 기고한 글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는 “인류가 더 이상 나가기 어려운 여건(석유정점)에 도달하자 그 보다도 더 위험한 낭떠러지(핵에너지 문명)로 돌진하려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핵무기보다 더 위험한 것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슈마허나 장회익 교수가 보내는 메시지는 아마 위험을 느끼지 못하고 광범하게 원자력 에너지에 빠져들고 이게 파멸적인 결과에 이를 수 있다는 경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이들의 주장은 예나 지금이나 소수파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소수파로 밀리는 것은 합리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일의 위험보다 오늘의 편리함이 더 절실하기 때문”이라는 대중의 심리 탓이라고 봅니다. 독일과 스위스는 이들 소수파의 합리성에 국민이 시선을 돌린 것인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의 국민과 정치지도자들은 이제 원자력 에너지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해온 전략적 고민에 덧붙여 철학적 고민도 병행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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