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01 12:32:04 게재
지난 화요일(3월 26일) 제주도에서 미세먼지가 온 섬을 뒤덮은 걸 보았다. 이날 오후 방송 보도의 미세먼지 농도를 보았더니 미세먼지(PM10)가 114㎍/㎥, 초미세먼지(PM2.5)는 74㎍/㎥이었다. 가까운 건물만 보면 봄볕이 쏟아지는 맑은 날씨였으나, 멀리 바라보면 한라산도 희미하게 윤곽만 보였고, 수평선이 보이지 않았다. 서울서 미세먼지를 자주 호흡했던 터라 무덤덤하게 생각했지만, 현지 주민들은 목이 답답하다며 짜증스러워했다. 그리고 중국을 원망했다.
‘제주도와 미세먼지’는 잘 어울리는 구절이 아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미세먼지 오염원이 아주 미미한 곳이다. 고작해야 30만여대의 자동차가 주 오염원이다. 공기는 국경도 없고 지역 경계도 없다. 100㎞ 바다 건너 육지에서 오든가, 아니면 황해를 건너 중국에서 왔을 것이다.
통계청이 3월 22일 발표한 ‘2018년 한국의 사회지표’를 보면, 한국인들이 미세먼지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알 수 있다. 미세먼지에 대해 ‘불안하다’고 답한 비율이 82.5%였다. 방사능 오염(54.9%)이나 화학물질 오염(53.5%)보다 훨씬 불안감이 높았다. 지난 3월 초 최악의 미세먼지 공습을 받았으니 지금 조사한다면 아마 90%가 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람들이 미세먼지에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공기청정기 판매량이 작년 1분기에 비해 올해 거의 100% 이상 늘어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미세먼지를 피해 이민가겠다는 젊은이들이 많아졌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일주일 만에 미세먼지가 심한 초등학교를 방문함으로써 현안 의제로 삼은 적이 있다. 또 올해 1월 22일 국무회의 모두 발언에서 “미세먼지 해결은 국민의 건강권을 지키기 위해 우리 정부가 채택한 국정과제이며, 그 약속을 지키려면 미세먼지 문제를 혹한이나 폭염처럼 재난에 준하는 상황으로 인식하고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재난 수준’을 입증이나 해주듯이 지난 3월 초 미세먼지가 연속 일주일 이상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방사능 화학물질 오염보다 불안감 높아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미세먼지 대책은 새로운 분수령을 맞는 것 같다.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을 ‘미세먼지 해결사’로 등판시킨 것이다. 문 대통령이 반 전 총장에게 ‘미세먼지범국가기구’ 위원장직을 맡아주도록 요청했고. 반 총장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청와대가 처음부터 미세먼지 범국가기구 같은 것을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가 사람(반기문)과 자리(미세먼지범국가기구위원장)를 제안하고 문 대통령이 이를 수용함으로서 성사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한편으론 희망을, 또 한편으론 회의(懷疑)를 느꼈다.
희망을 느끼는 이유는 반기문 전 총장의 경험과 국제적 영향력이다. 그는 유엔사무총장으로 2번 임기 10년간 재직하면서 풍부한 다자외교의 경험을 쌓았다. 미세먼지 문제는 국내오염원을 관리하는 것 못지않게 중국 등 이웃 나라와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2015년 파리기후협약을 성사시키는 데 깊이 참여했던 그의 경험이 미세먼지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미세먼지 문제는 기후변화 문제와 궤적을 같이 한다. 이산화탄소나 미세먼지나 모두 화석연료가 주 오염원이기 때문이다.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지 않고는 어느 것도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반 전 총장의 경험과 역할이 긴요할 것 같다.
회의를 느끼는 까닭은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해서는 행정력을 동원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의 한국의 정치권처럼 묻지마식 정파 대결이 첨예한 상황에서 과연 문 대통령이 그런 힘을 반 전 총장에게 줄 수 있느냐는 점이다. 또한 그런 힘을 반 전 총장이 얻는다한들 야당이 협력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반기문 전 총장은 문 대통령과 만난 후 기자회견에서 미세먼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치권이 정치적 이해득실로 접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미세먼지는 정파도 이념도 국경도 없다고 말했다. 옳은 말이다. 여·야 정치권이 절제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미세먼지 이슈는 정치 쟁점으로 쉽게 불붙을 것이다.
유엔사무총장보다 어려운 과업일 수도
반 전 총장도 지적했듯이 미세먼지 문제는 과학적 접근이 우선이다. 과문해서 모르지만 반 전 총장은 미세먼지에 대한 폭넓은 과학적 전문적 지식의 소유자가 아니다. 누군가의 머리를 빌려야 한다. 범국가기구에 지식과 힘을 갖춰야 한다. 일이 어려워질 요소다.
더욱이 미세먼지 문제는 산업생산, 에너지, 교통, 물류, 소비생활까지 이해관계자가 복잡하고 첨예하게 얽혀 있다. 총론엔 동의해도, 각론엔 첨예하게 대립할 것이다.
반 전 총장은 이 일이 어렵기 때문에 하겠다고 다짐했다. 반기문 전 총장은 대통령을 향해, 정당을 향해, 관료체제를 향해, 시장과 도지사를 향해, 궁극적으로 소비자를 향해 절제와 협력을 요구하고 쓴소리를 해야 한다. 유엔사무총장 역할보다 훨씬 어려운 과업일 수 있다. 명예와 예우와 대접을 홀연히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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