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2 11:34:27 게재
‘유령함대(ghost fleet)’란 소설이 있다. 미국의 안보 전문가 피터 싱어와 오거스트 콜이 2015년 공동으로 써낸 사이버 전쟁 시나리오다. 중국이 러시아와 짜고 태평양에서 미국을 공격하여 하와이를 점령하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중국은 어떻게 막강한 첨단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을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을까? 그 비결은 사이버 기습이다. 개전 순간 중국은 미국의 첨단 제트 전투기들을 일시에 작동 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미국이 전투기를 제조할 때 비밀리에 접근하여 마이크로 칩을 전투기 컴퓨터 시스템에 심어 놓은 것이다.
3년 전 이 소설이 나왔을 땐 단순한 재미거리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허구로만 가볍게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미국의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BBW)가 10월 4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미국의 첨단 기술회사의 전산 서버에 비밀 ‘스파이 칩’을 심어 놓았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BBW는 발행부수 36만부를 가진 뉴욕의 영향력 있는 경제 주간지다. BBW가 폭로한 중국 ‘스파이 칩’ 소동은 정말 놀랍다.
애플은 2015년 컴퓨터 네트워크에서 이상한 반응이 일어나는 걸 인지했다. 원인을 추적한 결과 실리콘밸리의 회사 ‘슈퍼마이크로’에서 납품받은 서버의 회로기판(motherboard)에 좁쌀 크기의 칩이 심어진 것을 발견했다. 애플은 이 사실을 연방수사국(FBI)에 신고했다. 같은 해 아마존도 인수 작업을 벌이던 다른 기술회사 서버에서 이상한 칩을 발견했다.
애플과 아마존 등 거대한 회사는 수천 개의 서버를 세계 각국에 설치해서 운용한다. 이 서버의 핵심이 회로기판인데, 여기에 이상한 칩이 심어진 것이다. 회로기판은 ‘슈퍼마이크로’가 만든 게 아니고 전량 중국회사에서 발주한 것이었다.
미국 보안당국이 조사한 결과, 서버의 기판회로가 모두 ‘슈퍼마이크로’의 중국내 하청기업에서 조립되었고, 그 공정에 인민해방군 산하 조직이 개입하여 갖가지 압력과 회유로 기판에 작은 칩, 즉 ‘스파이 칩’을 심었다. 중국은 이 스파이 칩을 통해 애플과 아마존은 물론 미국 주요 은행 등 30개 미국기업을 해킹했으며, 이 중에는 미 국방부 및 CIA와 거래하는 업체도 포함되어 있다고 BBW가 보도했다.
‘애플 등 해킹’ BBW 보도
BBW보도가 나가자 애플과 아마존은 그 같은 사실이 없다고 즉각 부인했다. 미국의 많은 언론매체들도 이 ‘스파이 칩’ 소동 보도에 신중하다. 그러나 BBW는 애플의 내부자와 정부 당국자 등 17명이 중국 스파이 칩 발견 사실을 증언했다고 밝혔다. 미·중의 무역 전쟁이 첨예한 상태이고, 중국이 이 보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세계 각국 정부나 기업들이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스파이 칩’소동은 전 세계를 강타했다. 문제가 된 ‘슈퍼마이크로’는 매출액 규모 20억 달러의 세계 서버 시장 1위 기업이다. 이 기업의 서버를 공급받아온 IT 회사들과 각국 정부 기관은 겉으론 조용하지만 안에선 초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다. 국내 한 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슈퍼마이크로’ 총판 10여 곳을 통해 국내에도 많은 서버가 들어왔고, 삼성 LG KT 등 대기업과 국가정보원 서울대 등 교육기관에 보급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가장 파장이 큰 곳은 역시 중국이다. 중국이 대표적 PC제조사 레노버의 주가가 BBW보도가 나간 다음날 15%나 폭락하는 등 중국 통신장비업체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 무역전쟁의 연장선상에서 트럼프 정부의 제재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스파이 칩’ 소동 본질을 들여다보면 초연결 사회 산업 정보망이 국가 지원을 받는 해커에 의해 얼마나 쉽게 뚫릴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보통 해커는 네트워크 운용 소프트웨어에 바이러스를 심어 침투하는데 반해 이 경우는 하드웨어 칩을 회로기판에 꽂아 뒷문을 열어놓은 것처럼 설계자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 스파이 칩을 이용한 해커는 첫째 서버에 보관된 정보를 도둑질 할 수 있고, 둘째 서버에 바이러스를 유포해 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다. 즉 사이버 테러를 감행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설 ‘유령함대’가 실재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해준다.
미중무역전쟁 와중에 터진 것 의미심장
이 스파이칩 소동이 미·중 무역전쟁의 와중에 터진 것도 의미심장하다. 스파이 칩 소동의 장본인은 중국이지만, 첨단 스파이 기술의 원조는 미국이다. 일반적으로 소프트웨어는 미국의 세상이지만 컴퓨터의 회로기판 등 장비를 만드는 하드웨어 분야는 중국의 무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격언이 있듯이, 모든 IT산업의 길은 중국으로 통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한국은 세계 12위 경제력을 갖고 있는 산업 국가이면서 첨예한 안보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다. 한국을 둘러싼 중국 미국 러시아 일본은 사이버 공격 능력을 가진 기술 및 군사 대국들이다. 북한 또한 20년 전부터 사이버 전사를 훈련시켰고, 실제로 한국 국방부를 해킹했던 사이버 전력을 갖고 있다.
한국의 정부 기관이나 기업이 운용하는 서버에 ‘스파이 칩’이 침투했다는 소식은 아직 없지만, 해킹에 쉽게 노출될 위험이 크다. ‘유령함대’는 한국에서 올해 봄 번역·출판되었는데, 정치적 변화와 남북대화 무드에 적응해야 하는 한국군의 장성과 장교들이 이런 것을 읽을 분위기와 여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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