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비자’ ‘마스터’카드 안 받아요

구상낭 2024. 1. 2. 22:42

2018-10-08 09:59:18 게재

 

지난 9월 하순 중국의 ‘전기차100인회’(電氣車100人會)가 주관하는 ‘신에너지자동차’ 포럼을 보기 위해 항저우(杭州)에 ‘번개여행’을 했다. 일행은 포럼을 보기 전 날 오후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항저우 외곽에 있는 BYD(比亞迪))버스 조립공장을 구경했다. 날씨가 덥고 공장이 너무 커서 두어 시간 구경하고 나니 지치고 시장기가 돌았다.

안내역을 맡은 옌벤 출신 젊은 BYD 직원에게 항저우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이 있는지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고층빌딩이 즐비한 시내 중심가로 버스를 돌려 찬란한 조명이 층층이 켜진 쇼핑센터로 안내했다. 1층에 ‘티파니’ 매장이 있는 것을 보고 고급 쇼핑센터인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몇 층을 올라가니 ‘外婆家’(와이포쟈)란 중국어 간판과 ‘Grand-ma's Home'이란 영문 간판을 겹쳐 붙여 단 식당이 있었다. 한국식으로 번역하면 ’외할머니집‘이다.

안내인이 먹고 싶은 음식 종류를 묻고 나서 일행 일곱 명이 먹을 요리와 맥주를 주문했다. 면, 민물고기, 새우, 동파육, 땅콩, 야채 볶음밥 등 종류도 많고 양도 푸짐하게 나왔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일행 중 기업인 한 사람이 “오늘 저녁은 제가 내겠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다국적기업의 중국공장을 총괄했고 지금도 중국을 자주 드나드는 경영자다. 고맙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먹으면 얼마나 나올까’ 짐작해 봤다. 서울 중심가라면 30만 원은 족히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가 끝나고 그 기업인이 BYD안내인과 함께 계산대로 가더니 잠시 후 우리를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보니 음식점은 비자나 마스터카드를 받지 않았다. 달러도 안 받았다. 식당은 알리페이, 유니온카드, 위쳇페이나 위안화만 받는다고 했다. 할 수 없이 그 경영자는 한국 돈 10만원을 꺼내 안내인에게 주었고, 안내인은 그가 가진 중국 결제수단으로 음식 값을 지불했다.

중국의 결제수단으로 음식값 지불

일행은 모두 놀랐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음식 값이 생각보다 훨씬 헐했기 때문에 놀랐고, 간판을 영어로 표기까지 한 중심가의 음식점이 비자나 마스터 카드로 결제를 거부하는 것에 놀랐다. 20년 전 베이징을 여행할 때 한국 돈을 빼앗듯이 받아 가던 중국 식당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라면 한 그릇을 먹어도 크레디트카드로 결제하던 터라 항저우 같은 도시에서 이런 일을 보니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항저우란 도시를 생각해보았다. 지금은 경제력에서 상하이에 밀렸지만, 아편 전쟁 이전인 200년 전만 해도 세계 최대 도시였다고 전해진다. 경치가 좋고 물산이 풍부했기에 옛날부터 중국인들은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라고 자랑했다. “하늘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蘇州)와 항주가 있다.”라는 뜻이다.

지금도 항저우는 중국인 모두 부러워하는 부를 창출하고 있다. 마윈의 알리바바 본사가 있고, 자동차나 IT기업 등이 번창하고, 인구 1,000만에 육박하는 거대 도시다. 2016년에는 G-20 정상회의가 열릴 정도로 국제도시의 위상도 갖춘 것 같다. 범위를 넓혀 항저우를 품고 있는 저장성(浙江省)은 면적과 인구가 한국과 비슷하고 국민총생산(GDP)은 한국의 절반이다. 어느 모로 보나 중국에선 앞서 번영하는 지역이다. 이런 중국의 첨단 대도시에서 비자나 마스터 카드가 지불수단으로 통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문득 미국과 21세기 패권경쟁을 벌이는 중국을 생각해 보았다. 20세기 역사를 반추해보면 미국 패권은 경제력과 과학기술에 바탕을 둔 군사력으로 세계질서를 주도했다. 미국이 세계질서를 좌지우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그들에게 편리하게 국제 ‘표준’을 확립한 것이다. 소프트파워 일종이다. 각종 국제거래에서 영어와 달러는 표준이 됐다. 특히 기축통화로서 달러는 모든 나라 화폐를 통제하는 세계 화폐가 됐다.

1978년 중국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을 국가 방향으로 정한지 40년 만에 중국은 14억 인구를 갖고 역사상 가장 산업화를 빨리 이룩한 경제대국의 지위에 올랐다. 국제정치, 경제력, 군비, 과학기술 등 모든 방면에서 미국과 맞서는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다.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들려하나

중국이 미국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세계 표준’을 중국식으로 만드는 일이다. 아마 중국이 그리는 궁극적 패권의 그림은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들어 전 세계인의 결제수단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 중국은 21세기 패권을 잡기 위해 중국 역사상 없었던 두 가지 거대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바로 2049년 중국의 과학기술능력을 미국을 능가하게 만드는 ‘중국제조2025’계획이 그 하나고,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까지 묶어 중국 중심의 경제권을 형성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계획이 또 하나다.

미국은 중국의 이러한 팽창을 한사코 저지하려 할 태세이고, 중국은 미국의 저지망을 무너뜨리려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지금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험악한 무역전쟁도 패권경쟁의 큰 틀에 포함되는 것이다. 패권을 잡는 나라의 화폐가 기축통화의 위상을 확보한다는 역사적 경험에서 미·중 패권경쟁은 바로 달러와 위안화의 기축통화 경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김수종 언론인 전 한국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