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그룹

마지막 단풍잎

구상낭 2022. 11. 8. 12:35

자유칼럼 2010-12-09 09:33:53

 

열흘 전쯤 일본 아오모리(靑森) 지방을 여행하였습니다.

제주도의 부속섬 가파도의 해녀 가족들과 가파도를 ‘탄소제로섬’으로 만들자는 민간단체 사람들이 동북 지방의 구즈마키(葛卷)고원목장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화석연료를 쓰지 않으려는 에너지 자립마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둘러보는 여행단 일행에 끼었습니다.

 

짧은 일정에 많은 걸 구경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견학보다도 온천 노천탕의 단풍나무가 던져준 조용한 충격이 시간이 갈수록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이 추운 계절에 그런 여행을 한다는 것이 좀 생뚱맞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쏟아지는 폭설로 아오모리 일대는 아름다운 설국(雪國)으로 변했습니다. 울창한 삼나무 숲을 배경으로 빗금을 치듯 쏟아지는 눈보라 광경은 아득한 동화의 나라와 같았습니다.

 

하루 종일 눈보라 속을 여행하다 어둑해져서야 고마키(古牧) 온천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고마키 온천은 태평양에 면해 있는 미사와(三沢)에 위치해 있으며 일본의 유명 온천 중 하나입니다.

 

고마키 온천에는 노천탕이 있었습니다.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 얼굴을 내밀고 몸은 뜨거운 노천탕 속에 담그는 맛이 겨울 온천욕의 묘미입니다. 이날 고마키 노천탕은 겨울밤의 정취를 완벽히 갖춘 분위기였습니다. 눈이 쏟아지면서 바람에 흩날리는 것이 조명에 반사되었고, 반쪽 하늘은 눈구름이 덮였지만 다른 반쪽은 별이 총총 빛났습니다. 노천탕에서 흘러넘친 온천물이 연못물과 어우러지면서 연못 위에는 뽀얀 안개가 맴돌았습니다. 그 너머 연못 둔치에 단풍나무 한 그루가 빨갛게 물들었습니다. 그야말로 ‘몽환의 세계’였습니다.

 

이튿날 아침 날이 밝자 다시 그 노천탕을 찾았습니다. 전날 밤의 야경 분위기는 사라졌지만 빨간 단풍나무는 더욱 화려했습니다. 눈을 한참 감고 있다가 떴습니다. 그리고 다시 단풍나무를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꼭대기에서 단풍잎이 하나 뚝 떨어지는 게 보였습니다. 눈을 떼지 않고 계속 바라보니 이 가지 저 가지에서 단풍잎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 잎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건 별로 눈여겨 본 적이 없기에 조용한 충격이 느껴졌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절로 떨어지는 잎이 그렇게 가슴 속으로 휘감겨드는 것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인생무상이라더니 이 때 느낌이 바로 그런 거였습니다.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시간을 의식하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을 노상 느끼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다가 가까운 친지의 죽음,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주름진 얼굴, 친구 자녀의 결혼, 선거나 권력세계에서의 세대교체를 보고 시간의 흐름을 순간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연륜 위에서 사물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세월의 무상함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되나 봅니다.

 

떨어지는 나뭇잎에서 굳이 죽음만을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시간이 가면 무엇이든지 변하고, 어떤 자리에서든지 떠나야 하고, 자기의 분수를 찾아 다시 위치해야 합니다. 조금 버티려고 아등바등하다가도 한 줄기 바람에 무참히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익숙한 것에 대한 집착은 인간 본성입니다만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는 나이를 먹을수록 실감하게 됩니다.

 

12월은 시간의 흐름을 많이 느끼는 계절입니다. 대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시작하는 시기여서 모든 게 유동적입니다. 조직사회에서는 인사이동 같은 일이 많으니 더욱 시간이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1천 8백여 년 전 로마의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잠시 되새겨 봅니다.

“아! 온 날을 세지 말며, 그 날의 짧음을 한탄하지 말라. 너를 여기서 내보내는 것은 부정한 판관이나 폭군이 아니요, 너를 여기 데려 온 자연이다. 그러니 가라. 배우가 그를 고용한 감독이 명령하는 대로 무대에서 나가듯이. 아직 5막을 다 끝내지 못하였다고 하려느냐? 그러나 인생에서는 3막으로 극 전체가 끝나는 수도 있다. 그것은 작자가 상관할 일이요,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기쁨을 가지고 물러가라. 너를 물러가게 하는 것도 선의에서 나오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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