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아직 끝나지 않는 4.3 트라우마

구상낭 2022. 12. 22. 12:29

2015-04-06 11:42:27 내일신문 게재

 

아빠와 나의 고향 대정에는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라는 4·3 유적지가 있다. '백조일손'은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란 뜻이다. 즉, "조상이 다른 132명의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한날, 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되었으니 한 자손"이란 것이다. 나의 할머니의 남동생은 여기에 묻혔다.

 

아빠가 일을 하러 나가고 우리 사남매가 심심해하면 할머니는 언제나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치 인어공주의 슬픈 이야기를 하듯이.

할머니는 이제 손녀가 누군지, 자신의 아들이 누군지 분간도 못한다. 처음 할머니가 아팠을 때 아이처럼 울부짖었던 기억이 머릿속에 생생하다. 늙어서 하얗게 막이 생겨버린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허공을 향해 손을 뻗으며 외치던 할머니의 모습. 남동생의 마지막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그렇게 할머니는 남동생 이름을 자꾸 부르며 몇 시간, 며칠, 몇달을 울부짖었다. 자신이 낳은 아들도 알아보지 못한 채 오직 남동생의 이름만 불러댔다. 4·3의 상흔이었다. 아빠는 이러한 역사의 상처 속에서 개인이 고통받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서 자라났다. 그래서 아빠는 본인의 입으로 자신은 '사회 불만세력'이었던 것 같다고 한다.

사회 환경과 가정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아빠는 늘 무엇인가를 갈망했던 듯하다. 바람은 볼 순 없지만 그것이 어디로 향하는지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마음도 이와 같아서 아빠의 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사회를 바라보는 아빠의 눈은 나에게도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다.

위의 글은 몇년 전 제주대학교에 다니는 한 여학생이 아버지를 주제로 쓴 에세이의 한 부분이다. 4·3이 아버지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느끼게 해주는 글이었다. 이 여학생이 언급한 '백조일손지묘'는 4·3의 수많은 충격 스토리 중 하나다.

4·3의 상흔 간직한 '백조일손지묘'

4·3이 발생하고 2년 후인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북한에 동조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각 지구 계엄사에 좌익분자 체포 구금령을 내렸다. 제주지구 계엄당국은 보도연맹원과 4·3사건 때 체포됐다 석방된 사람들은 물론 무고한 양민 등 193명을 예비검속이라는 이름 아래 검거했다. 군은 8월 20일 새벽 2시 한림지역에서 붙잡아 온 61명의 예비검속자를 섣알오름의 옛 일본군 무기고 구덩이에 몰아넣고 모두 총살했다.

군은 이어 오전 5시 대정 일대의 예비검속자 132명을 역시 섣알오름 골짜기에 몰아넣고 총을 난사해서 다 죽인 후 흙으로 시신을 덮어버렸다. 재판도 없이 국가 권력에 의해 자행된 대량 학살(Genocide)이었다. 132구의 시신수습은 오랫동안 이 사건을 은폐하려는 군 당국에 의해 허용되지 않았다. 6년이 지나서야 유가족에게 시신수습이 허용됐지만 뼈가 뒤엉켜 신원을 구분할 수 없었다. 유가족들은 적당히 뼈 조각을 나눠서 한곳에 공동묘지를 만들고 '백조일손지묘'라는 비석을 세웠다.

섣알오름 학살이 일어나던 날 132명이 총살장으로 끌려가던 마을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죽음의 골짜기로 끌려가는 어린 남동생의 모습이 얼마나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으면 아들 이름도 잊어버린 치매 할머니가 동생의 이름만 외쳐댔을까. 여학생에게 이 죽음은 직계 존속의 일이 아님에도 4·3의 트라우마는 끝나지 않은 채 3대째 이어지고 있다.

한 역사학자가 지적했듯이 4·3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보여준 사건이었다. 4·3 희생자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숫자가 1만4000명이 넘는다. 제주도 사람들은 "울어도 죄가 되는 반세기의 세월"을 살아왔다. 주민 10명 중 1명이 희생된 4·3의 진상이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이유다.

내년 4·3 추념식에는 대통령 나왔으면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시 중의 하나로 알려진 T.S. 엘리엇의 '황무지'가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것은 바로 이 첫 구절 때문일 것이다.

까만 돌담이 둘러쳐진 들판에 핀 노란 유채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제주의 풍광. 사월의 제주섬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은 환상적인 봄의 생명력을 만끽한다. 그러나 정작 제주도민들에게 사월은 4·3 광풍의 상흔이 되살아나는 잔인한 계절이다.

3일 제주 4·3평화공원에서는 정부 주최로 추념회가 열렸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는 게 화제다. 아직도 이념의 틀에 박힌 사람들이 대통령의 발목을 잡은 것일까.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수많은 한국인을 희생시킨 중국 공산당 정권과 한국 대통령이 지금 어떤 일들을 함께 벌이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내년엔 대통령이 4·3 추념식에 나와 복잡한 이념 계산들을 한방에 날려버렸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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