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저유가 치킨 게임

구상낭 2022. 12. 22. 12:27

내일신문 2015년 3월 6일

 

 

치킨게임은 1950년 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했던 기()싸움 놀이였다. 두 사람이 자동차를 타고 마주 보며 달리다 먼저 핸들을 꺾고 피하는 사람이 겁쟁이로 몰려 승부가 나는 게임이다. 제임스 딘 주연의 영화 이유 없는 반항에는 두 젊은이가 절벽을 향해 치킨게임을 숨 막히게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요즘 국제 석유 시장에서 치열한 치킨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최대 산유국 사우디와 최대 석유 소비국 미국이 벌이는 석유 값 내리기 게임이다.

게임의 발단은 2008년에 본격화한 미국의 셰일혁명이다. 석유는 유한한 자원이어서 그동안 석유 값은 계속 오르는 일만 남은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미국에서 새로운 기술 개발로 수천 미터의 셰일 층에서 대량의 석유가 생산되면서 유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40여 년간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가격 카르텔에 끌려 다녔던 미국은 셰일혁명으로 전략적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반면 중동 산유국은 물론 베네수엘라와 소련 등 국가 살림살이 대부분을 석유 수출에 기대어 살아가는 소위 석유국가((petro-state)들은 심각한 재정 위기에 봉착했다.

석유국가가 이럴 경우 써먹는 전가의 보도(寶刀)는 감산(減産)조치다. 산유국 가격카르텔 기구인 OPEC은 감산 조치를 통해 유가를 조절하며 국제 정치와 세계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석유 소비국들은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작년 말 사우디를 비롯한 OPEC회원국 석유장관들은 비엔나에 감산을 논의했다. 베네수엘라 등 대부분 산유국들은 감산해서 가격 하락을 막자고 주장했고, 회원국은 아니지만 러시아도 등 뒤에서 베네수엘라를 응원했다. 그런데 사우디가 감산 조치에 반대했다. 종주국 사우디의 반대로 OPEC은 하루아침에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결국 OPEC이 주도하던 석유가격 카르텔이 붕괴한 것이다. 유가는 반년 전에 비해 절반 수준, 즉 배럴당 50달러 수준으로 폭락했다.

유가 하락으로 사우디도 다른 산유국과 다름없이 고통스럽다. 그렇지만 사우디는 다른 전략적 판단을 하고 있다. 석유 수급의 패권이 미국으로 향하고 있는 마당에 감산조치를 하면 미국의 기만 살려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즉 석유 가격이 배럴당 70달러 수준을 유지하면 비교적 생산비용이 많이 드는 미국의 셰일 석유 생산은 수지가 맞아서 계속 증산되고 셰일 유전도 더 많이 개발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석유수급의 주도권은 더욱 미국으로 기울고 사우디는 자칫 시장점유율마저 잃을지 모른다.

사우디의 전략은 유가하락을 방치하는 것이다. 석유 값이 50달러 이하로 장기간 유지되면 개발비가 많이 들어가는 미국의 셰일 유전이 견딜 수 없어 결국 유가는 반등할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다. 사우디 유전은 생산 원가가 세계에서 가장 저렴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치킨게임에서 승산이 있다고 본 것이다.

사우디는 또 다른 노림수, 즉 일시적인 유가 하락이 산유국에 대한 사우디의 영향력을 과시할 기회가 된다고 보고 있다. 과거 OPEC이 감산조치를 취했을 때 회원국들이 속임수를 썼다. 감산조치에 합의하면 산유국에게 감산 쿼터가 할당되는데 베네수엘라 같은 얌체 국가들은 이를 지키지 않고 오히려 증산해서 유가상승의 이익을 챙겼다. 또한 OPEC회원국이 아니면서 거대 산유국인 러시아는 감산에 동참하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서 유가 상승의 이익을 챙겨갔다. 사우디에겐 매우 괘씸한 존대들이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속담처럼 중소 석유국가들은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석유자원을 갖고 미국을 향해 큰소리 쳤던 베네수엘라는 절반으로 줄어든 석유수출액 때문에 거의 재정파탄에 이르렀다. 재정의 60% 이상을 석유수출로 충당해온 러시아의 고통 또한 크다. 치킨게임에서 아무 변수도 못되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석유값 하락과 서방의 제재조치로 가위에 눌려 있는 형국이다. 이란, 이라크, 리비아, 나이제리아 등도 사정은 비슷하다.

사우디의 치킨게임은 사우디의 의도대로 미국의 유전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미국의 셰일 유전들이 유가 하락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고 있다. 세계의 에너지 업계는 물론 정책당국자들이 모두 이 게임의 귀결이 어떤 결말을 불러올지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다. 장차 유가가 어떻게 움직일지 전문가마다 다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요즘 한국인들은 석유 값의 대폭락으로 큰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근년 한국의 석유수입에 들어가는 돈은 약 1,000억 달러였다. 현 추세대로 저유가가 유지되면 연간 500억 달러가 절약된다. 한국의 정부, 기업, 소비자들은 지금 느긋하다. 아마 에너지 관련 정책 당국자들은 요즘 두 다리 쭉 뻗고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셰일 혁명은 단기적 현상은 아니며, 유가 폭등을 견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은 석유는 극도의 전략적 상품이며, 여전히 유한한 자원이며, 우리 땅에서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난 50년간의 에너지 역사를 반추해 볼 때 석유 값과 관련한 돌발 변수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또한 기후변화 이슈와 관련하여 화석연료를 무진장 쓸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유 있을 때 준비해야 한다. 지금이 국가의 장기 에너지 수급 전략을 합리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으로 짜야 할 때다. 저유가에 마음이 풀려 있을 때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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