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1억원 연봉의 사회학

구상낭 2022. 12. 8. 17:07

내일신문 2014-04-02 10:29:23

 

 

우리 화폐 단위의 기초는 1원이다. 1962년 화폐개혁 당시 1원은 가게에서 눈깔사탕 한두 개를 사먹을 수 있었던 돈이었다. 그러나 지금 1원을 갖고 구매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원은 은행 계좌나 회계 장부에서 쓰이는 단위일 뿐이다.

요즘 우리는 '1억 원'이라는 말을 화폐 단위로 입에 달고 다닌다. '1억'이란 말을 뱉어내는 데 1초면 족하다. 그러나 1억은 대단한 숫자다. 1원짜리 동전을 하나씩 세어서 '1억 원'을 세려면 휴식 시간 없이 세어도 3년 2개월이 걸릴 것이다. 천문학적인 수치다.

한국은행에서 갓 출고한 1만 원 짜리 지폐 100장 다발의 두께는 약 1㎝다. 손으로 집어 들면 기묘한 볼륨감과 무게를 느낄 수 있다. 1억 원은 그런 100만 원 묶음 100개가 모인 것이다. 지금 한국의 최저 임금은 5,210원이다. 최저 임금을 받는 근로자가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8시간씩 2,399일 동안 일하면서 한 푼도 쓰지 않아야 모을 수 있는 돈이 1억 원이다.

40년 전 필자가 신문사 기자로 입사해서 받은 초봉이 월 4만 원쯤 되었던 것 같다.그 당시에는 연봉 개념보다는 ‘월급+보너스’ 시스템이어서 보너스를 연간 몇 퍼센트 받느냐가 직장인들의 관심이었다. 공기업이 대개 연간 400%의 보너스를 지급했고 괜찮은 사기업들이 그 수준에 맞췄다. 필자의 연봉은 65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 1억 원은 아무나 입에 올리는 액수가 아니었다. 노동의 대가로서 연봉 1억은 국영기업 사장은 물론 대기업 임원도 꿈꿀 수 없는 돈이었다. 보통 월급쟁이들은 평생 월급을 모아도 1억 원이 되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던 때다. ‘1억 원’이라는 액수는 국가예산의 단위거나 대기업의 매출단위거나 했지, 개인의 경제 생활에서 떠올릴 수 없는 액수였다.

그런 '1억 원'이 고소득층의 연봉 단위로 자리 잡았다. 수 십 억대 월급쟁이가 쑥쑥 나올 정도다. 국세청이 발간한 ‘2013년 국세통계연보’에 따르면 2012년 1억 원 이상 연봉자가 41만5천 명에 이르렀다. 직장인 100명 중 3명이 억대 연봉자라는 얘기다. 억대 연봉자가 늘어나는 속도로 볼 때 아마 지금쯤은 그 숫자가 45만 명에 육박하지 않았을까 싶다.

인플레로 그 가치가 상당히 까먹었지만 ‘1억 원’은 지금도 사회 심리적으로 상징성이 큰 숫자다. 일반 직장인에게 1억 원은 꿈의 연봉이다. 1억 원은 한 편으로 탐스러운 숫자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금기의 숫자이기하다. 1억 연봉을 갈구하면서도 공개되기를 꺼린다. 1억 연봉을 받는 순간부터 그 당사자는 사회적 주시의 대상, 비판의 대상이 되기가 쉽다. 우리나라 공무원 봉급체계도 1억 원이 심리적 마지노선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러 가지 경제적 특혜를 받으면서도 1억 원 천정을 깨는 데 부정적 힘이 작용한다. 5천만 국민이 주시하기 때문이다.

공무원과는 달리 공공기관은 1억 원 연봉의 천정을 끊임없이 뚫고 있다. 최근 KBS수신료 인상 문제가 제기되면서 KBS 직원들의 억대 연봉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KBS의 억대 연봉 논쟁 과정은 이렇다. 머니투데이가 최민희(야당) 의원이 ‘KBS 직급별 현원 및 인건비 현황’이란 자료를 인용하여 2012년 KBS 직원 4,805명 중 57%인 2,738명이 연 1억 원이 넘는 급여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KBS측이 즉각 그게 아니라고 반박했다. KBS가 전수 조사를 한 결과 억대 연봉은 57%가 아니라 37%라는 것이다. 이 주장의 차이는 9,612만원의 연봉이 책정된 2직급 직원의 성과급 지급 여부 문제에 따른 논쟁이다. KBS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KBS에는 1,500명 이상의 억대 연봉자가 있다. 어떤 공공기관보다 억대 연봉자 밀집도가 높다.

그러나 KBS 억대 연봉자의 문제는 그들이 하는 일의 실상이다. 감사원이 며칠 전 지적한 것을 보면 억대 연봉을 받는 1급 387명 중 60%가 보직 없이 심의실이나 송신소 등에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다. KBS주변과 방송가에서는 '창가족'이란 말로 잘 알려진 숙제다. 감사원의 수사(修辭)는 완곡했다. 그러나 다른 공공기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KBS가 어떤 보도태도를 가질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KBS는 우리나라 매체 중 뉴스와 시사 보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영방송 시스템이다. KBS가 보도 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사안의 중대성을 판단하고, 선악을 판단하고, 사회정의를 가늠하며, 바람직한 미래사회의 방향을 설정한다.

KBS는 공공기관으로서 롤모델이 되어야 하며, 공영매체로서 공정성을 유지해야하고, 또한 문화 콘텐츠산업의 주춧돌이 되어야 한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연봉수준과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인센티브 제도를 병행해야 하는 모순적 고민을 안고 있다. 억대 연봉도, 수신료 인상도 정당화할 수 있는 경영개혁이 절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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