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2013-05-02 15:05:27
독일 연수를 마친 대학 교수가 귀국길에 미국 여행을 위해 LA에 있는 친구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두 친구에게는 똑 같이 초등학교 1년생인 아들이 있었습니다. 두 친구가 이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디즈니랜드를 구경하러 나갔습니다.
뒷좌석에서 곧 친해진 초등학생 둘이 창밖을 내다보며 떠들다가 독일서 온 아이가 갑자기 외쳤습니다.
“베엠베”
그러자 미국에 사는 초등학생이 더 큰 소리로 고함쳤습니다.
“노우, 비엠더블유”
두 아이는 핏대를 올리며 자기 말이 맞는다고 우겼습니다.
독일서 살다 나온 아이는 미국 거리에서 독일제 자동차 BMW를 보고 반가워서 독일식으로 말한 것인데, BMW를 미제 차로 알며 자란 아이는 미국식 발음을 고집한 것입니다.
30년 전 이야기입니다. 1980년대 LA나 샌프란시스코 거리에는 외제차가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지식 노동자들이 외제차를 선호했습니다. 학교 선생과 오피스 레이디 등 수입이 그렇고 그런 젊은이들은 높은 연비와 고장 없는 혼다의 어코드나 토요타의 캠리 같은 일제차로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값이 헐하고 운행이 경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실리콘밸리의 젊은 엔지니어와 벤처기업가, 금융브로커, 변호사, 의사 등 1980년 대 왕성하게 출현한 여피족들(yuppie)들은 아우디, BMW, 볼보 등 유럽산 고급차를 선호했습니다. BMW는 단연 여피족의 상징물이었습니다.
요즘 서울 거리에 외제 자동차가 부쩍 많아진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내 기억력이 얼마나 정확한지 모르지만 BMW 차종만 놓고 본다면 30년 전 미국의 거리에서 보았던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BMW를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외제차 급증 현상은 언론보도를 통해 통계적으로 입증됨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지난해 수입차 신규 등록 대수가 13만858대로 2011년의 10만5,037대보다 24.6% 증가했다고 합니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자동차 총 대수의 10.01%를 외제차가 점유한 것입니다. 올해 들어 수입차 등록 대수 증가추세는 더욱 두드러져서 1/4분기(1~3월) 수입차의 점유율은 11.76%에 달합니다.
처음 외제차 수입이 허용된 1987년(10대 판매) 이후 20년 전(1992년)에 0.21%, 10년 전(2002년)에 1.30%였던 점유율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우리 사회가 지금 경제위기에 처했다고 말하는 데, 외제 고급 승용차 소비가 급격히 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고급차를 구매할 수 있는 사람들이 급속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수입자동차협회가 공표한 외제차 판매 동향을 보면 외제차 중에서도 독일제 자동차 선호가 두드러진 게 특징입니다. BMW, 벤츠 아우디, 폭스바겐 등 4종의 독일제 자동차가 외제차 총 등록 대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60%에 육박합니다.
BMW는 아주 독보적입니다. 올해 1/4분기를 본다면 외제차 100대가 팔린다면 그 중 25대가 BMW입니다. BMW가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고급 외제차의 정상에 올라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급 외제차를 구입하는 소비층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협회가 확인 가능한 분류로서 유일하게 연령대가 있습니다. 30대가 외제 고급차를 가장 많이 사는 것으로 나타났고, 그 다음이 40대입니다.
언론 분석에 따르면 이렇게 값비싼 외제차를 많이 살 수 있는 것은 메이커들이 저금리 할부 판매방식으로 호기심과 소비욕구가 강한 젊은 소비자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할부금과 이자를 갚아나가야 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야 외제차를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30, 40대에 이런 소비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젊은 전문직업인 들, 즉 변호사, 의사, 금융회사브로커, 벤처사업가, 글로벌기업의 간부 등 소위 한국판 여피족이거나 부동산 부자 또는 부유층의 자녀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참고 견뎠던 30년 전의 초기 산업사회가 아닌 것입니다. IMF위기라든지 세계금융위기 같은 쇼크를 거치면서 국가경제는 중산층의 붕괴로 건강을 잃었지만 글로벌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은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하며 새로운 고소득 계층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소비성향이 한국을 명품소비 사회로 만들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급 명품 소비의 극치가 바로 유럽산 고급 자동차입니다.
여기서 아주 관심이 쏠리는 대목은 외제차에 대한 선호가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기억은 확실치 않지만 1980년 대 초반 현대차가 진출하기 전 미국에서 외제차 점유율은 15%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때 20세기 미국 제조업의 보루인 자동차산업의 위기론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미국 자동차 시장의 외제차 점유율은 30%를 넘어섰습니다. 급기야 자동차 공장이 문을 닫고 거리에는 실업자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때리기가 극도에 달한 것도 그때입니다. 여전히 미국은 세계 최대의 자동차 소비국으로 일본과 독일에 큰 흑자를 내주면서도 말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1980년대 미국 사회에 불었던 일제 자동차 붐이 지금 한국에서는 그리 거세지 않는 채 고급 유럽산 자동차 열풍이 불고 있는 현상입니다. 한일 관계의 영향이라든가 일제차와 비슷한 성향의 한국차가 나오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아직은 지켜보아야 할 단계입니다. 마치 독일의 탄탄한 경제를 위해 한국이 열심히 독일차를 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 지경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외제차 점유율이 30%를 넘어서는 사태가 올까요. 젊고 원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고급 외제차를 타고 신호등이 없는 고속도로나 하이웨이를 쌩쌩 다릴 때, 퇴직 노년층은 낡은 국산차를 타고 신호를 기다리는 모습이 뉴스에 나오는 사태가 발생하지 말란 법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 되면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은 어떻게 될까요. 더욱 외제차와 경쟁하며 품질을 높여 해외에서 더욱 많이 팔리는 자동차를 만들어낼까요, 아니면 내수의 급감으로 위기에 처할까요.
‘외제차 10% 점유’ 소식을 들으며 이런저런 상상을 해봅니다. 외제차 점유율이 15%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전망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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