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2013-04-10 14:32:20
3월 하순 통영(統營)을 구경했습니다. 따뜻한 봄날이라 거리에는 벚꽃이 피기 시작했고, 바닷가엔 야생화들이 바람결에 흔들리니 따사로운 남해안의 봄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산 가덕도와 거제도를 연결하는 가거교도 건너보고 조그만 페리를 타고 통영 앞바다에 있는 섬들도 구경했습니다.
통영의 봄은 더욱 정겨웠습니다. 도시 모습도 많이 변했지만, 거제도를 비롯해 산업화가 진행되는 인근 지역에 비하면 통영의 산과 바다는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한 편입니다. 노리고 간 것은 아닌데 공교롭게도 나들이하는 날이 통영국제음악제가 한창 열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거북선이 정박한 부둣가를 중심으로 거리는 온통 축제분위기였습니다.
시인 유치환과 김춘수, 극작가 유치진, 시조시인 김상옥, 작곡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등 수많은 예술인들이 상상력을 길렀던 곳이 통영입니다. 그렇지만 이 통영 바닷가의 아름다움과 정겨운 지역정서를 말해주는 데 소설가 박경리가 쓴 ‘김약국의 딸들’만큼 기여한 작품은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 만큼 바다 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큰 섬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난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박경리는 통영을 조선시대 자본주의가 움튼 곳으로 묘사하고 있고, ‘조선의 나폴리’로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으니, 통영 출신 젊은 문인 예술가들이 서양과 일본 문물에 일찍 눈뜬 곳임을 짐작하게 됩니다.
여행의 묘미는 두 가지 요건이 결합할 때 배가됩니다. 첫째는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자연경관이나 풍물을 보는 것이고, 둘째는 새로운 사람과 교류하는 것입니다. 통영에서 두 가지 요건이 합쳐진 여행의 묘미를 보고 느꼈습니다.
요즘 통영에서 “어디에 가 볼 만하냐?”고 물어보면 아마 십중팔구 나오는 대답은 “동피랑 벽화마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피랑은 그곳 사투리로 ‘동쪽 벼랑’이란 뜻입니다. 벼랑 위의 동네란 게 과거 서울서도 흔히 보았듯이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던 달동네입니다. 그게 새로운 관광추세를 타고 벽화마을로 변해서 지금은 통영의 최고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옛날 달동네 주택을 조금씩 개조해서 벽면은 미술가들이 모여들어 벽화를 그렸습니다. 충무공과 거북선 그림에서 그리스 신화까지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것은 모두 이 동네의 벽화 주제가 되어 있습니다. 골목마다 옛 주택은 각종 기념품 가게 또는 카페와 먹거리 집으로 꾸며지고 개조되었습니다. 거리엔 오카리나 연주단이 둘러서서 흥겨운 봄노래를 연주하는가 하면, 마을 꼭대기 카페 마당에는 수십 명의 관광객을 앉혀놓고 현악사중주단이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감미로운 현악기 선율, 악기통에 반사되는 햇빛, 푸른 통영 바다, 개나리꽃이 한데 어우러졌습니다. 고갯길이 부담스러웠던지 관광객은 대부분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이날 우리를 동피랑 벽화마을로 안내한 사람은 몸은 가냘프지만 눈빛만은 초롱초롱한 윤미숙이라는 여자였습니다. 그는 ‘통영의제21’이라는 시민단체의 사무국장으로 통영 거제 일대에서 매우 유명한 사람입니다. 바로 동피랑 마을을 벽화마을로 만드는데 선도적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도시에서나 마찬가지이지만 통영에서도 여러 해 전 동피랑 재개발 계획의 도마에 올랐습니다. 달동네를 헐고 큰 건설회사가 짓는 고층 아파트로 가는 게 일반적 추세입니다. 그때 의제21이 지자체와 주민을 설득해서 벽화마을로 컨셉을 바꾼 게 계기가 되어 지금은 하루에도 수천 명이 찾아오는 유명 관광지로 탈바꿈하게 된 것입니다.
통영도 고밀도화 추세에 버티지 못해 고층아파트가 이곳저곳 들어서기는 했지만 옛 정취와 조망을 많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동피랑 벽화마을도 여기에 한몫 하는 것 같습니다. 아파트 숲 사이로 내려다보는 통영 앞바다보다 벽화마을에서 온전히 보는 바다가 좋습니다.
몇 년 전 통영에 갔을 때 현지인들로부터 불만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조선업이 호황을 이루고 섬 관광지를 개발하면서 인근 거제도는 날로 번창해서 관광객이 몰려가는데, ‘동양의 나폴리’라는 통영의 주민들은 관광객이 지나가는 것만 쳐다보아야 하느냐는 푸념이었습니다. 가거교의 준공으로 거제도는 더욱 번창하는 양달이 되고 통영은 상대적으로 응달이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영은 통영의 길을 가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동피랑 벽화마을이 그런 면에서 긍정적인 대안의 하나가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관광객의 마음과는 달리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동물원의 동물처럼 구경 대상이 되는 것이 불편할지도 모릅니다. 특히 관광수입이 시원치 않으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런 문제점을 푸는 것이 ‘통영의제21’과 윤미숙 씨의 숙제일 듯합니다. 어쨌든 동피랑 벽화마을을 구경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