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그룹

걷는다는 것

구상낭 2022. 11. 17. 12:51

 

자유칼럼 2012-11-27 23:05:22

  

지난 주말 모처럼 세게 걸었습니다. 그것도 칼바람이 몰아치는 제주도 올레길 21코스를. 아직 11월이면 제주도의 기후로는 가을 날씨이어야 하는데 올해는 겨울이 빨리 오는 건지 시퍼런 바다에 하얀 파도를 일으키며 불어오는 서북풍이 볼을 후려치는데 정말 얼음장 같았습니다.

이 날 올레를 걷게 된 계기는 (사)제주올레에 처음부터 관여했던 지인으로부터 같이 걷자는 제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주올레를 시작할 즈음 걷다가 만난 사람인데 마지막 코스에서 같이 걷게 됐으니 색다른 인연인 셈입니다.

2007년 9월 올레 1코스가 열린지 5년 2개월 만에 제주도 해안선 400여 킬로미터를 한 바퀴 휘감아 종결하는 ‘21코스’의 개장 행사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올레꾼(올레 길을 걷는 사람을 일컬음)들에겐 뜻 깊은 행사인 듯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2천명쯤은 모였습니다.

지미봉에서 바라보는 성산일출봉
이날 21코스의 하이라이트는 바닷가에 삿갓처럼 솟아오른 해발 165미터의 지미봉을 넘어가는 길입니다. 그 꼭대기에서 한 바퀴 둘러보는 경치는 장관입니다. 성곽처럼 바다위에 치솟은 성산일출봉, 소처럼 바다에 드러누운 우도, 한라산 정상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듯 늘어선 수많은 오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이렇게 탁 트인 경치 때문에 대도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와 같이 걷는 일행은 나이가 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서너 시간 걷는 중에 대화 주제가 다양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있고, 올레를 시작할 때의 회고담도 있고, 자연경관에 대한 느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지를 걸을 때는 젊은 사람들과 보조를 맞출 수 있었지만 가파른 지미봉을 오르면서는 숨을 헐떡거렸습니다. 종아리를 쓰다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간혹 이런 얘기도 많이 나왔습니다. “힘들지 않습니까.” “잘 걸으시는데”

불현듯 내가 걷는 모습이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내가 걷는 걸음이 자연을 바라보며 음미하고 즐기는 걸음이 아니라 내 몸을 바라보고 살피며 걷는 걸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근래 내 주위의 사람들 중에 걷는데 문제가 생긴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산행을 좋아하던 사람이 어느 날 무릎에 이상이 생겨 산을 오르지 못하게 됐다고 한탄합니다. 젊은 날엔 몰랐는데 걷는 게 얼마나 중요한 삶의 표출인지 다리에 문제가 생기며 절감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삶이라는 게 바로 걷는 것이고, 늙음은 걷기가 불편해지는 것이며, 죽음은 걸음이 중단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비탈길을 오르는 수천 명의 발걸음이 바로 삶의 행진처럼 엄숙하게 다가왔습니다.

“진정한 수도승은 자기 내부의 악마를 따돌리기 위해 평생을 걸어야하고 어떤 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말아야 한다.” 어떤 책에서 본 구절입니다. 걷는 것을 종교적인 차원으로까지 생각하진 못한다 해도 삶을 성찰하는 방법으로서 걷는 일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걷는다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삼보승차’라는 얘기가 말해주듯, 구조적으로 걷지 못하게 막아서는 것이 현대 도시 생활의 구조입니다.
아파트 문을 열고나서면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기다립니다. 특별히 작심하지 않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게 됩니다. 지하철을 타도 까마득한 계단을 오르기는 엄두가 나지 않아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엘리베이터,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버스, 택시를 잇는 출퇴근 또는 나들이니 하루 만보는 고사하고 오천보도 걷지 못하는 것이 도시인들의 생활 같습니다. 승용차 타기에 익숙한 사람은 하루 천보도 걷지 못할지 모릅니다.

주말만 되면 줄을 서야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산에 사람이 몰리는 것도 걸음을 상실한 도시생활로부터 이탈하고픈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주올레가 불을 붙인 전국적인 걷기 열풍은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두 발로 자연 속을 이동하고 싶은 욕구의 소산일 것입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걸을 수 있을 때 많이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집니다. 그냥 무심코 걷는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자유칼럼그룹'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  (1) 2022.12.05
하이에나 예산  (0) 2022.11.23
내 손주의 폭풍  (0) 2022.11.17
핸다리 어머니의 추억  (4) 2022.11.17
암스트롱에게 윙크를  (0) 2022.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