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관련

조선왕조 최고의 목동

구상낭 2022. 11. 23. 12:42

제주도 관련 2013-02-01 12:17:56

 

제주도에서 말을 많이 기르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나에게 말은 한 식구나 다름없던 존재였습니다. 한 번은 폭우 속에 들판에서 태어난 망아지가 죽을까 걱정되어서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습니다. 그때 내 품에 안긴 망아지의 서늘한 눈매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오늘부터 두 차례에 걸쳐 제주도의 말(馬)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말을 소재로 글을 쓰고픈 생각이 든 것은 이런 나의 정서적 공감대도 있는 데다, 조선조 최고의 ‘말 테우리’로 활약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최근 조명을 받고 있어서입니다. 테우리는 목장에 소나 말을 방목해 기르는 목동을 일컫는 제주 방언입니다.

지난 늦가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마을 목장 200만평을 배경으로 개관한 조랑말 박물관을 구경했습니다. 가시리는 제주도에서도 아름다운 유채꽃 길로 유명한 곳으로 ‘녹산장’이라는 조선조의 목장 지명을 갖고 있는 곳입니다. 아직 시설도 미완성이고 말떼도 볼 수 없었지만 원통형 노출콘크리트 옥상에 올라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우리나라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정말 몽골 평원을 연상시키는 대초원이 펼쳐지고 있어 조랑말 박물관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집니다.
이 박물관의 지금종 큐레이터가 들려준 이야기, 조선시대 김만일(金萬鎰)이라는 사람이 이곳을 무대로 전마(戰馬)를 육성하여 국가에 바친 공로로 헌마공신(獻馬功臣)의 칭호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과문 탓으로 별로 못 들었던 인물입니다.

조랑말 박물관을 방문하고 난 후 지인 한 사람이 나에게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 7권을 선물했습니다.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김만일을 또 만나게 됐습니다. 유홍준 교수는 이 책에서 제주에서 잊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김만일을 꼽으며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표상으로 평가했습니다.

김만일이 말을 길렀던 녹산장 일대의 풍경

 

김만일은 녹산장 일대에서 1만 마리의 말을 기르던 대 목장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에 필요한 전마 500마리를 국가에 헌납했고, 그 후 광해군을 거쳐 인조에 이르기까지 전란으로 육지부의 말 목장이 황폐화된 상황에서 1천 300두의 말을 조정에 올려 보냈다고 합니다. 이런 공로로 선조는 그에게 종2품 오위도총부 부총관의 관직을 내렸고, 인조는 종1품 숭정대부에 봉함으로써 제주 출신으로 최고의 관직에 올랐습니다. 김만일의 기부정신을 높이 산 조정은 김만일 후손들에게도 238년에 걸쳐 산마감목관이란 벼슬을 내리고 말을 길러 국가가 필요할 때 기여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서귀포시장을 역임했던 지인이 권무일(權武一)이라는 작가가 쓴 ‘말-헌마공신 김만일과 말 이야기’라는 역사소설을 한 번 읽어보라며 보내왔습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한 인물의 평전을 읽는 듯했습니다.

조선조 1등 개국공신 김인찬(金仁贊)은 함경도 사람으로 태조 이성계를 보좌했던 장수였는데 이성계가 등극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세상을 떴습니다. 그 후 태종은 그 아들 김검룡(金儉龍)을 제주의 마정(馬政)조직 개편을 담당할 감목관(監牧官)으로 임명하여 파견했는데, 이 사람의 자손들이 현재 경주김씨 집성촌인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 정착했고 그 6세손이 바로 김만일이었습니다.

김만일의 러브스토리를 비롯하여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허구였지만, 제주국마목장의 유래와 말에 대한 각종 통계, 전마를 육성하는 일, 임진왜란 때 선조가 제주를 걱정한 일, 광해군과 김만일의 교류 등에서는 기록을 찾아 헤맨 작가의 발품이 여실히 느껴졌습니다. 책 끝에 적어놓은 참고 서적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서 50편에 이를 정도로 기록에 충실한 소설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두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첫째 선조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제주도가 일본에 점령되지 않을까 무척 걱정했던 일이고, 둘째 광해군이 제주 말과 김만일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았다는 사실입니다. 작가는 이 두 대목을 조선실록 등 역사적 기록에 근거를 두고 썼다고 말했습니다.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황신(黃愼) 등이 제보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제주도 침공계획 첩보를 놓고 비변사 회의에서 선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히데요시의 야욕을 알 만하다. 제주도는 천하의 정세에 관련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왜적이 제주에 수만의 군사를 배치하여 지구전을 펼친다면 우리나라는 정녕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제주를 빼앗기게 되는 날은 우리나라가 망하게 되는 때로다. 이 점이 걱정스럽다.”
병조판서 유성룡이 응답했습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전라도는 이순신이 장악하고 있으니 안심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제주로 보낼 배도 군사도 없습니다.”

만약 임진왜란 때 일본이 제주도를 점령했다면 당시 조선의 국력이나 정치상황으로 볼 때 지금 일본 땅이 되어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곧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기에 이러한 상황은 역사적 가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역사서에는 임금을 중심으로 한 조정의 움직임과 장수들의 활약상과 패퇴기록은 자세히 나오지만 전쟁물자 보급과 민간생활에 대해서는 별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의병의 격서나 실록에는 전마의 필요성이 절박하게 호소되고 있고, 그때마다 제주 목사는 전마를 구해 올려 보내느라 정신없었습니다.

광해군은 불운의 군주였습니다. 전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위에 올랐으니 국력은 쇠잔할 대로 쇠잔했고 누루하치가 이끄는 만주의 북방세력이 세를 얻으면서 명나라가 패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어서 미묘한 안보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광해군은 전마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김만일을 조정으로 불러들여 특별히 독려했습니다. 광해군이 제주 전마와 김만일에게 보낸 개인적 관심이 무척 컸던 점을 생각할 때, 인조반정으로 궁궐에서 축출되어 말년에 유배지 제주에서 쓸쓸히 죽어간 것을 생각하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김만일의 일대기를 찾아 헤맨 작가 권무일 씨는 고향이 경기도 평택으로 서울대 철학과 64학번입니다. 그는 현대그룹 임원으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회사 퇴직 후 사업을 벌였으나 그의 말대로 ‘쫄딱 말아먹고’ 팔도를 방황하다 2004년 제주에 내려왔습니다. 문리대 동창들 사이에 '장자'로 알려진 그는 추사의 유배지 대정골에 방을 얻어 살며 제주의 자연과 역사에 흥미를 느끼고 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제주 ‘유배생활’에서 ‘의녀 김만덕’ ‘남이’ 그리고 ‘말-헌마공신 김만일과 말 이야기’ 등 3권의 역사소설을 썼습니다.

작가는 김만일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 평전을 쓸 요량으로 기록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실록과 여러 서적에서 나온 것은 딱딱하고 단편적인 기록뿐이고 의귀리 등 현지에서 얻을 수 있는 자료는 출처가 분명치 않은 구전의 토막 이야기였기에 소설형식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추사의 유배생활 기간과 비슷한 9년을 대정골에 살고 있습니다. “추사는 제주를 몸서리치게 싫어했지만 저는 너무 좋아합니다. 오름마다 이야기가 있고 제주 신화는 정말 환상적입니다. 제주를 소재로 삼는 문인들이 4ㆍ3에만 집중하는 경향인데 저는 그 이전의 제주 역사에서 캐낼 것이 많다고 봅니다.”

비록 소설이지만 이 책을 통해 조선시대 말이 갖는 의미를 그 시대의 눈으로 바라볼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제주는 그야말로 절해고도였지만 말의 공급지로서 서울의 조정과 상류사회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생활로 비교하자면 말은 자동차나 진배없었던 것이니 세도가와 부호들에게 제주도는 고급차를 생산하는 자동차공장과 비슷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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