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2012-04-10 15:46:03
지역구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보낸 두툼한 선거공보 우편물, 봉투를 열었더니 정당 공보물이 좌르르 쏟아졌다. 비례대표 명단과 정책공약 모음이다. 그러고 보니 총선은 1인2표, 즉 후보에 한 표 정당에 한 표씩을 찍게 되어 있다. 이번 총선의 등록 정당 수는 20개란다. 총득표수의 3% 이상 득표하면 비례대표 의원을 배출하게 된다.
정당 공보물을 모아 비교하면 신문 기사가 전해주지 못하는 정당 정치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미디어의 초점을 받는 새누리당과 통합민주당은 당명을 바꾼 지가 몇 달 되지 않았지만 당명보다 색깔과 기호 숫자를 강조하는 이미지 편집에 치중했다.
새누리당(기호 1번) 공보물의 빨간색 배경은 놀라운 변신이다. 박근혜 위원장이 평범한 당원 및 지지자들과 나란히 서 있는 표지구도는 통신회사 이미지 광고를 연상시킨다. 은연중 대선까지 의식한 것 같다. 박근혜 조명철 이에리사를 제외하면 44명의 비례대표 후보들은 별로 지명도가 없는 얼굴들이다.
통합민주당(기호 2번) 공보물의 바탕색은 노란색이다. 민주당의 전통을 색감으로 이어받았음을 느끼게 한다. 겸손을 전제했지만 메시지의 초점은 정권심판이다. 38명의 비례대표 명단을 보면 한명숙 대표와 몇 명의 시민운동가의 얼굴이 익숙할 뿐이다. 아, 시인 도종환씨가 한명숙 바로 뒤 당선권에 올라 있다.
정당의 비례대표 1번은 상징적이다. 옛날에는 당수가 차지했는데 이번 총선에선 당의 정책공약을 상징하는 인물들이 많다. 새누리당 1번은 여성 핵과학자 민병주씨이고, 통합민주당 1번은 노동운동의 선구자 고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씨다. 과학기술과 성장을 상징하는 과학자와 일자리와 분배를 상징하는 노동 운동가인 두 여성의 이력에서 두 당의 정책 방향도 대조를 이룬다.
자유선진당(3번)은 원내교섭단체 구성과 세종신도시 정책공약 완성을 호소하고 있다. 충청권을 향한 어필이 엿보인다. 16명의 비례대표 후보 명단에 변웅전씨가 4번에 올라있는데, 당선이 확정적인 1번은 카톨릭의대 재활의학과 문정림교수다. 의사협회 대변인 경력을 갖고 있는 여성이다. 의료계를 대변하겠다는 당의 활로 모색이 엿보인다.
통합진보당(4번)은 '반 한미FTA' '반재벌‘을 강조한다. 20명의 비례대표는 노동운동가와 시민운동가들이 주력이다. 유시민 공동대표가 12번, ‘가카빅엿’ SNS파문에 이어 법관재임용에서 탈락한 서기호씨가 14번이다. 당선이 확실한 비례 1번에 농사짓는 여성 농민운동가 윤금순씨를 올려놓았다.
창조한국당(5번) 공보물은 5년 전 대통령에 출마했던 문국현씨의 ‘사람 중심 진짜경제’ 프레임 그대로다. 비례대표 1번은 34세의 젊은 여성 당료 윤지영씨다. 문국현씨는 대법원판결로 선거에 참여할 수 없고, 남아 있는 현역의원들마저 출마를 포기했으니 제3의 길은 어두워지는 것 같다.
보수를 살리겠다며 박세일씨가 창당한 국민생각(6번)은 메기론을 내세운다. 메기론은 정치의 주역이 아니라 조역을 상징한다. 7명의 비례대표 중 1번을 전여옥씨가 차지한 이유가 궁금하다. 대국민중심당(7번) 공보물은 전면에 손바닥(엄마 상징)을, 뒷면에는 발바닥(노인 상징) 그림을 그려서 엄마와 노인을 위한 정당을 표방했지만 비례대표 1번은 2선 의원 출신인 당대표 구천씨가 차지하고 노인대표는 2번에 놓았다. 엄마의 모습은 명단에 아예 없다. 친박연합(8번)은 박정희 정치철학을 계승한다며 대구 경북에 텃밭을 둔 정당으로 사무총장 김기목씨가 비례 1번을 차지했다.
기독당(10번)은 기독교 정당을 표방하고 종북좌파 척결과 교회 은행대출 2% 인하를 정책공약을 내세웠다. 비례대표 1번은 당대표이자 신학자 김충립씨. 보수적 가치를 내세운 미래연합(13번)은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 정당인 듯싶은데 비례 1번은 당대표이자 지역 기업인 김하영씨다.
녹색당(11번)도 ‘반핵’ 구호를 들고 나섰다. 원전을 가진 영남지역 두 선거구에 후보를 냈고 3명의 비례대표후보도 환경 농업 생태 운동가들이다. 1번 이유진씨는 반핵운동을 벌여온 인물로 고리 원전 1호기 폐쇄문제가 대두되는 시점에서 원전 주민 반응이 주목된다.
야당통합 및 단일화에 반발하여 통합민주당에서 이탈해 나온 사람들이 만든 정통민주당(15번)은 장기표씨를 비례 1번으로 내세웠다. 진보신당(16번)도 통합진보당의 통합과 전략적 단일화에 반대해서 독자노선을 걷는다.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자’의 저자인 홍세화씨와 귀화 러시아계 한국인 티코노플라디미르(한국명 박노자) 등 진보 지식인들이 다수 비례대표 명단에 올라 있지만, 비례 1번은 30년간 청소만 해온 비정규 노동자 김순자씨를 내세웠다. 청년당(17번)은 안철수의 청춘콘서트 참여자들이 새바람을 일으키겠다는 포부를 담고 창당했으며 비례대표 1번은 여성 변호사인 강연재 당 대변인이다.
당의 지속가능한 통치 비전과 정책 방향을 고민한 정당들은 비록 규모는 작아도 비례대표 1번을 이념과 사회 대표성에 두었지만, 그렇지 못한 정파는 당을 대표하는 인물의 입지확보에 연연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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