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2012-01-31 11:50:37
105년 전에만 해도 중동에 유전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 세계 석유 생산량의 약 30%가 이란, 이라크, 사우디를 연결하는 페르시아 만의 삼각지대에서 나오고, 확인 매장량의 약 60%가 이곳에 묻혀 있다. 이 지역이 세계 경제의 숨통을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동 유전 개발의 원조(元祖)는 이란이다. 1908년 이란에서 중동 최초로 석유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유전개발의 주체는 이란인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이란인들은 자기네 땅 밑에 많은 석유가 고여 있는 줄도 몰랐다. 설령 알았다 해도 시추공을 뚫고 석유를 퍼낼 필요도 못 느꼈을 것이고 기술도 없었다. 당시 석유의 쓰임새는 오늘날과 같은 광범한 에너지원과 산업 소재가 아니었다.
이란의 사막 속에 묻힌 석유를 노크한 것은 런던 사교계의 명망가이자 사업가 ‘윌리엄 다시’였다. 미국에서 록펠러가 석유사업으로 한창 돈을 벌던 1901년, 다시는 이란 왕실로부터 60년간의 배타적 석유채굴권을 따냈다. 영국 돈 2만 파운드를 공여하고 매년 순익의 16%를 이란 정부에 준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2만 파운드는 다시가 세운 석유회사의 자본금 규모였다.
다시는 지질학자 조지 레이놀즈를 고용하여 석유탐사에 나섰으나 7년 동안 40만 파운드를 날리고 쫄딱 망했다. 1908년 5월 초 부도에 직면한 다시는 작업을 중지하기로 결정하고 이란 현장에 있는 레이놀즈에게 전문을 보냈다. 시추를 중지하고 모든 장비와 비품은 다 폐기처분하고 귀국하라고. 레이놀즈는 귀국 명령을 차일피일 미루던 중 5월 26일 오후 그의 시추공에서 검은 석유가 분출했다. 중동 석유가 세상에 선보였던 순간이다. 다시는 주식을 공모하여 석유회사를 설립했으니 그게 APOC(앙글로-페르시안 석유회사)이다. 영국석유(BP)의 전신이다.
이란 석유의 큰 고객으로 나선 것은 대영 제국의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이었다. 당시 상선이든 전함이든 거의 모든 배는 석탄을 연료로 사용했다. 1912년 비운의 처녀항해 중 침몰한 타이타닉호(4만6천톤)도 석탄 증기선이었다. 통찰력을 가진 처칠은 석유를 연료로 하면 전함의 기동성을 높일 수 있다는 데 착안하고 1913년부터 영국 전함의 동력을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는 획기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처칠은 영국정부가 APOC의 지분을 갖게 하여 이란 석유생산을 양산체제로 갖췄고, 세계 최대의 아바단 정유소를 세웠다. 처칠의 선견지명은 적중했고, 1914년에 발발한 2차 대전에서 석유 엔진을 장착한 탱크와 함정이 맹위를 떨침으로써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당시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영국이 1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란에서 석유를 실어오는 것이 위험하고 불안했다. 처칠은 의회와 언론의 드센 비판에 둘러싸였다. 처칠은 공급처의 다변화를 주장했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에서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에너지 안보논란과 별로 다르지 않다.
플라톤은 2천4백 년 전 ‘인구가 늘고 국가가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자원을 놓고 쟁탈전이 벌어지니 전쟁은 일어나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석유는 20세기 이후 중요한 전쟁의 촉발 원인이었고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전략물자였다. 석유발견 이후 일어난 중동의 전쟁 비극은 석유와 연결되어 있다.
이란은 이런 갈등의 핵이다. 이란의 석유 매장량은 1,370억 배럴(미국CIA추정치)로 세계 3위이고, 천연가스 매장량은 세계 2위다. 남한의 16배가 넘는 국토와 약 7천800만 명의 인구가 있다. 자체 매장량 규모로도 그렇지만 중동 석유 수송로의 안전운항을 담보하는 호르무즈 해협을 끼고 있는 전략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감안하면 이란의 영향력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미국과 이란의 적대 관계는 세계 에너지 안보의 불안정 요인이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세력이 1979년 미국의 지지를 받는 팔레비 왕을 축출하고 신정체제를 구축하면서 양국은 30년에 걸쳐 서로를 증오해왔다. 이란은 미국을 ‘사탄’으로 규정했고, 미국은 이란을 ‘악의 축’으로 몰아붙였다. 미국과 이란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이란의 핵개발 프로그램이다. 중동의 패권을 원하는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은 미국 등 서방이나 인근 아랍국들이 원치 않는 일이다. 석유의 안정적 가격과 공급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에너지 안보의 불안요인이기 때문이다. 불안하게도 이란의 핵개발 프로그램 강행은 통제하기 어려운 궤도를 밟고 있다.
석유시장에는 두 개의 국제 질서가 있다. 하나는 미국 등 소비국이 주도하는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석유수출국 기구 질서다. 미국의 이란 석유수입 감축 요구는 한국의 이익에 부분적으로 반하지만, 이를 반대할 때 돌아올 큰 손실을 대차대조표로 따지지 않을 수 없다. 변화와 흐름을 보는 통찰력과 외교적 수완이 고도로 요구되는 때이다. 이란은 지리적 거리로 따질 수 없게 우리 옆에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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