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가스관 밸브 만지는 푸틴

구상낭 2022. 12. 11. 23:16

 

내일신문

2014-03-18 11:31:53


2006년 1월 1일 오전 10시 우크라이나 정부는 경악했다. 차가운 한 겨울, 그것도 새해 벽두에 5천 만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가스관이 올 스톱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가스회사 가즈프롬이 우크라이나로 들어가는 가스관 밸브를 잠가버린 것이다.

동시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정부를 향해 “우크라이나를 경유해서 유럽으로 나가는 가스관에서 가스를 빼 쓰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상황이 너무나 절박한 나머지 유럽으로 통하는 가스관에서 가스를 빼돌렸다. 그러자 이번엔 가스공급이 줄어든 동유럽 국가들이 난리법석을 떨었다. 동유럽에만 공급되던 가스가 두 지역으로 나누어지면서 두 지역 모두 가스가 모자라게 된 것이다.

며칠 만에 협상으로 대치상태가 끝나고 가스 공급이 재개됐다. 그렇지만 충격은 전 유럽을 두들겼다.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가스관(pipeline)이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는 물론 유럽인들에게도 생명줄(lifeline)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 셈이다.

이 소동이 벌어질 당시 러시아의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이었고, 가즈프롬 회장은 현재 러시아 총리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였다. 그 때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가스 공급을 중단했던 이유는 현재 우크라이나 사태의 연장선상에 있다.

1991년 소련연방의 해체로 독립된 우크라이나는 동서로 분리되어 갈등했다. 지역적으로 러시아계가 많이 사는 동쪽은 러시아 편을 들었고, 우크라이나 민족이 주를 이루는 서쪽은 점점 유럽 쪽으로 기울었다. 동서 갈등이 극명하게 표출된 사건이 바로 2005년 12월에 종결된 ‘오렌지 혁명’이다. 오렌지 혁명으로 친 유럽 성향의 빅토르 유센코가 대통령이 되자 푸틴 대통령은 첫 경고로 가스관 밸브를 잠근 것이다. 러시아의 품을 떠나려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경고 메시지였지만 부수적으로 유럽인들에게 러시아 가스 공급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셈이다. 러시아로서도 가스공급 중단이 경제적 손실은 물론 원하지 않는 사태로 전개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볼 때 우크라이나는 너무도 상실감이 큰 땅이다. 역사적으로는 제정 러시아의 발상지나 다름없으며, 지정학적으로는 유럽, 중앙아시아, 러시아 그리고 흑해로 둘러싸여 있어 러시아의 안보와 군사전략에 절대적 요충지이다.

러시아 제국의 옛 영화를 재건하고 싶어 하는 권력자 푸틴에게 우크라이나의 친 유럽행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소비에트연방 같은 완전한 통일 국가를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분리 독립한 국가들을 안보, 경제, 문화적으로 묶어 유럽연합(EU)에 대항하는 유라시아연합(EAU)을 만들고 싶은 것이 푸틴의 대외 전략의 기초이고, 이런 관점에서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영향권에 묶어두는 것은 푸틴의 야망이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압박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두 가지이다. 첫째 크림반도를 비롯하여 동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러시아계 주민의 분리 독립을 부추기는 일이고, 둘째 우크라이나로 가는 가스 파이프라인 밸브를 잠그고 경제적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무력통합도 생각할지 모른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말할 때 왜 가스관이 중요한 화제가 될까. 러시아의 천연가스는 우크라이나 산업을 움직이는 혈액이다. 옛 소련의 산업시설을 물려받은 우크라이나는 세계에서 가장 에너지 효율이 낮다. 서부 시베리아에서 생산된 가스를 값싸게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후에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아주 특별한 가격으로 가스를 공급해왔다. 싼 가스 값에 취해 우크라이나는 에너지 다변화도 효율화도 이루지 못했다. 우크라이나에게는 아킬레스건이다.

러시아 국영회사인 가즈프롬은 푸틴 권력의 돈줄이다. 가즈프롬은 연간 러시아 재정의 15%에 해당하는 막대한 세금을 국가에 바친다. 가즈프롬은 유럽에 수출하는 가스의 70%를 전장 6,000킬로미터의 우크라이나 관통 파이프라인을 통해 보낸다.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은 이 송유관을 ‘왕관의 보석’이라고 불러 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일종의 볼모라는 얘기다. 우크라이나가 이 파이프라인을 잠그면 유럽은 가스부족에 시달리지만 동시에 러시아의 돈줄이 말라버린다. 따라서 푸틴이 가스관 밸브를 잠그고 우크라이나를 압박하는 게 만만치 않는 도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의 가스 파이프라인은 1979년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에서 동독 경제를 도와주기 위해 제안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유럽이 소련에 의존할 위험이 있다고 반기를 드는 바람에 러시아 가스 의존도를 25%로 타협함으로서 프로젝트가 성공했다. 균형이라는 것이 국제관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21세기는 가스의 시대다. 한국도 북한을 거쳐 시베리아와 가스 파이프라인으로 연결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파이프라인에 얽힌 국제 관계의 살벌한 역학을 교훈적으로 잘 보여준다.

 

 

'내일신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명암  (0) 2022.12.20
남경필과 원희룡의 '협치' 실험  (0) 2022.12.13
황창규의 스마트에너지  (0) 2022.12.11
철학을 가진 전문가를 찾아라  (1) 2022.12.11
세월호의 3단계 비극  (1) 2022.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