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5-25 23:54:07
오월이지만 날씨는 벌써 초여름입니다. 그러나 해발 고도가 1,500미터 이상 되는 고산 지대에는 이제야 봄이 한창입니다. 오월 중순에 한라산에 올랐습니다. 철쭉이 꽃망울을 막 터뜨리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백록담 정상을 정복하겠다는 마음보다는 그냥 산 공기를 마시며 소요하는 기분으로 걷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작년 말 새로 개방한 돈내코 코스를 택했습니다.
돈내코는 서귀포시 상효동에 위치한 계곡이름입니다. 옛날에 멧돼지들이 많이 몰려들었던 냇가라 하여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돈내코 코스의 출발점은 해발 450미터입니다. 1,950미터의 백록담 정상까지는 무려 1,500미터의 해발 고도를 올라가야 하는 벅찬 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남벽의 자연붕괴가 심하여 새로 개방한 코스에서 백록담으로 가는 길은 폐쇄됐습니다. 암벽을 기어오르는 짜릿한 맛 대신 색다른 트래킹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한라산에는 4개의 등산로가 있고 저마다 특징이 있으나 이 길은 참 독특한 트레일 코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생각엔 ‘명상의 길’ 쯤으로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발점에서 등산객을 맞아주는 것은 죽은 자들이 묻혀 있는 대규모 공동묘지입니다. 이어서 길고 긴 난대림 숲의 녹음을 뚫고 나오면 고도 1,500미터의 평궤(‘궤’는 제주어로 바위동굴의 뜻) 휴게소와 그 뒤로 기괴한 풍광의 백록담 화구벽이 다가섭니다. 이 길은 백록담 화구호 암벽의 외곽을 빙 돌아 윗세오름까지 이어지는데, 해발 1,500~1,700미터를 오르내리는 화산암 고원 지대를 걷게 됩니다.
여기는 온통 관목과 고산식물의 세상입니다. 검은 바위 틈 사이 어디에건 연분홍 꽃떨기를 내민 철쭉, 근래 한라산 전역을 점령한 채 겨울을 새우느라고 잠시 누렇게 변신한 채 쉬고 있는 산죽(山竹), 계곡을 따라서 늘어선 구상나무 숲, 금방이라도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은 백록담의 거북 껍질 같은 암벽, 그리고 태평양의 휘어진 수평선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매우 몽환적이었습니다. 이날따라 높은 구름이 햇볕을 가리면서 온 세상이 잿빛 조명에 잠기는 듯해서 더욱 이런 분위기를 더했습니다.
마산에서 온 산악회 회원들, 미국인 남녀, 중국의 젊은 대학생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지만 넓은 고원 위에서 그들의 떠드는 소리가 공기 속으로 빨려 드는지 산은 조용했습니다.
어떤 등산객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철쭉꽃 떨기 사이에 침낭을 깔고 얼굴만 내민 채 행복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아마 꽃밭에서 장자의 나비 꿈을 꾸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의 얼굴에 정상을 염두에 두지 않는 여유로움이 보였습니다.
높은 산에 오르면 나와 나를 둘러싼 자연이 더욱 입체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리고 마음의 여유만 가진다면 시간의 흐름을 음미할 수도 있습니다. 돈내코 코스는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곳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꼭대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만 하는 등산코스에서는 숨차고 지쳐서 시공(時空) 속에 묻혀버리는데, 비교적 평탄한 화산암 고원 지대를 걸으니 잠시 내가 나 자신을 관조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게 4차원 세계의 경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백록담에서 남벽을 타고 돈내코로 내려오다가 대피소에서 무서운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새우잠을 자고 이튿날 눈을 뜨니 세상은 고요한데 녹음 사이로 햇살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녹색의 아름다움에 전율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다시 한 세대가 훌쩍 지난 후 같은 길을 걸으면서 많은 상념이 떠올랐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시간의 상대성을 말했다는데, 시간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꼭 같은 길이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실감하게 됩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과 기쁨을 누리는 사람 곁을 지나가는 시간의 속도는 서로 다르고, 하루 세 끼 먹는 사람과 두 끼 먹는 사람에게 시간의 길이는 각각 다릅니다. 더욱이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이 느끼는 시간의 속도가 같을 수가 없습니다.
높은 산을 걸으며 자신의 존재와 시간을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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