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2010-08-27 08:09:01
실크로드 여행을 하면서 말로만 듣던 위구르인들을 실제로 만나 보게 되었습니다. 중국이 워낙 땅이 넓고 인구가 많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지만,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를 보고는 우리가 생각해온 중국과는 다른 중국이 있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19세기부터 세계의 지붕이라 불렸던 중국의 서쪽 끝자락 파미르 고원으로 빙하 구경을 갔습니다. 해발 3,000m만 넘으면 골짜기마다 빙하가 걸려 있습니다. 설선(雪線) 아래로는 침엽수가 자라고 푸른 목초지가 산비탈을 따라 흘러내립니다. 그 가파른 경사지에서 양과 염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풍경이 마치 스위스의 알프스를 보는 것과 같이 목가적입니다.
빙하가 녹아 흘러내리는 계곡을 따라 점점이 작은 마을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흙벽돌로 만든 집들이 도란도란 모여 있고, 채마밭에는 살구가 노랗게 익었습니다.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는 짬을 냈습니다. 소변을 보고 싶어 마땅한 장소를 찾는데 때마침 집 앞에서 나이 어린 소년이 낯선 이방인을 호기심 있게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손짓발짓을 했더니 그 소년이 나를 데리고 노천 화장실로 안내했습니다. 널빤지를 깔아 만든 화장실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미국의 그랜드캐년에서 보았던 기괴하고 시뻘건 바위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화장실 시설은 재래식이지만 전망만은 세계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집 마당의 큰 살구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하나 따 먹어도 되느냐고 손짓을 했더니 마당에 나와 있던 소년의 부모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가지 높이 달린 열매를 따느라고 애를 먹자 소년의 아버지는 가지를 휘어주며 내가 따먹기 편하도록 했습니다.
나는 살구를 여러 개 따서 먹고 열매가 달린 가지도 꺾었습니다. 과일을 가지째 꺾는 것이 얼마나 과수원 주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를 나는 경험적으로 압니다. 남의 과일을 따먹었으니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에 소년의 손에 돈을 쥐어주려고 했더니 소년은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섰고, 부모들도 받지 말라고 아들에게 손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억지로 소년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소년은 결국 손으로 돈을 꼭 쥐었고, 부모는 매우 미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소년과 부모는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얼굴이었고 키도 작았습니다. 그러나 눈이 깊고 코가 높은 색목인(色目人)의 얼굴이었습니다. 문명에 그리 때 묻지 않은 타림분지의 위구르인들의 모습은 선진 문명인이라고 자처하는 우리가 잃어버린 순수하고 평화로운 얼굴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돌궐족과 흉노족, 우리가 한족(漢族) 중심의 중국사를 공부하고 책을 읽으며 참 많이 들었던 종족입니다. 돌궐(突厥)이나 흉노(匈奴)란 말을 들으면서 머리에 떠올리는 인상은 뭔가 야만성이 있고 무식하게 싸움이나 하고 약탈하는 이런 것입니다. 이름 자체에 오랑캐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돌궐족과 흉노족이 중앙 아시아를 누비던 역사 시대의 이미지를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의 위구르족은 바로 이 돌궐족 후예의 일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서역이라고 부르는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원주민이 위구르인들입니다. 우리나라의 17배나 되는 신장자치구의 인구는 대략 2,100만 명인데 이 중에 45%가 위구르족으로 최대 민족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기 전까지 이 지역에는 한족이 5%도 차지하지 못했지만 그 이후 중국 정부의 한족 이민정책에 따라 현재 한족의 비율은 41%까지 올라갔고, 작년의 위구르 폭동에서 보듯이 민족분규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오늘날 위구르인들은 광대한 타림분지의 오아시스 지역에 몰려 살고 있습니다. 이들의 조상은 원래 유목민족이었지만 텐산산맥 이남의 오아시스를 따라 농경사회를 이뤘고, 실크로드의 주역으로 동서의 교류를 중개했던 종족입니다. 그러한 지정학적 이유로 수천 년에 걸쳐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엄청난 변화와 고난을 겪은 민족입니다. 한족과 흉노와 몽골의 침략을 받았고, 종교적으로는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마니교, 불교를 거쳐 이슬람으로 민족단위의 개종을 거친 희한한 역사를 지녔습니다. 위구르 사회는 중국 국경 안에 존재하지만 하루에도 몇 차례씩 메카를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이슬람 세계 속에 삽니다.
실크로드 상의 도시를 방문하면 그 중심에는 현대식 건물이 하늘 높이 치솟아 있지만 변두리는 지붕이 평평한 흙벽돌집이 꽉 차있습니다. 보통 위구르인들이 사는 동네입니다. 노새나 당나귀가 이끄는 수레에 식구가 모두 올라타고 갑니다. 소위 우리의 오일장과 같은 ‘바자르’에는 노새와 자전거와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뒤엉켜 시끌벅적한데, 남자들은 오각형의 도파를 머리에 쓰고 여인들은 짙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바자르 거리에는 그들의 주식인 ‘난(naan:중앙아시아의 빵)을 구워 파는 노천 가게가 즐비합니다.
간판은 지렁이 모양의 위구르어(아랍문자)와 그 밑에 한자로 병기되어 있습니다. 실크로드를 타고 서쪽으로 갈수록 위구르어 글자는 커지고 한자는 작아지는 것이 신기합니다. 파미르 고원 직전의 오아시스 상업도시 카슈가르에선 광장의 모택동 동상과 간판의 한자어가 없다면 우리의 눈에 중국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바자르와 관광지를 어슬렁거리는 한족은 거의 이방인과 같았습니다. 위구르 아이들은 한국인을 용케 구분하고 ‘코리아’라고 신기한 듯 중얼댑니다.
중국의 기적적인 경제발전에 따라 위구르자치구도 하루가 다르게 발전합니다. 무진장한 천연가스와 석탄자원이 묻혀 있습니다. 중국의 중요한 유전도 이곳에 있습니다. 앞으로 각광 받을 태양광과 풍력 에너지도 그 잠재력이 무진장합니다. 밀의 품질이 세계적이라고 합니다.
역시 길은 변화를 가늠해볼 수 있는 곳입니다. 옛날 낙타나 말이 걷던 실크로드는 아스팔트로 포장된 하이웨이로 변했습니다. 미국이나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시설에 비하면 뒤떨어졌지만 그 길에는 대형 트럭이 쉴 새 없이 달립니다. 1970년대 말 경부고속도로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끔 당나귀가 끄는 수레를 타고 이 하이웨이를 이동하는 위구르인을 보면서 묘한 감정이 일었습니다. 아직은 그들의 길이 아닌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장(新疆)을 영어로 번역하면 ‘new frontier’(뉴프론티어)입니다. 청나라 때 서역의 영토 경계를 그으면서 붙인 이름입니다. 한족 중심의 중국 입장에서는 정말 잘 지은 이름이겠지만 위구르인들에게는 애달픈 이름입니다. 중국이 병합하기 전 혼란한 시기에 그들은 동투르크스탄이란 국명으로 정부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서양 지명사전에는 East Turkistan이란 중앙아시아적인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이 이름을 쓰는 분리 독립 망명단체도 활동합니다. 그래서 중국은 이런 이름을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우리와는 어쩌면 가장 먼 곳에 살고 전혀 교류가 필요치 않을 것 같은 위구르인들인데, 현지에서 보면 좀 기구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고 가깝게 느껴집니다. 사실 위구르인들은 실크로드를 통해 한반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게 학자들의 연구결과입니다. 당나라 때 신라 고승 혜초가 천축국에 불경을 구하러 가면서 위구르 사람의 밥을 얻어먹었을 것입니다. 석굴과 불화를 비롯한 불교문화는 위구르인들이 불교를 신봉할 때 중국을 거쳐 한국에 전해진 것입니다. 문화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포도나 당근 등 서아시아의 식물이 전해졌습니다. 특히 학자들은 경주 유적을 연구하면서 이 위구르인들이 한국과 인적교류를 했다는 주장도 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한때 강성한 제국을 만들었지만 근대의 해양시대와 현대의 항공시대가 되면서 위구르인들은 내륙 속의 내륙에 사는 오지인으로 세계의 관심을 잃었습니다. 요즘은 우리 스스로 수난의 민족사를 강조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세계는 몇몇 중심 국가를 제외하면 변경이나 완충지대에 위치하면서 참 어려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종족이나 국가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위구르인도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시 현지에 가보지 않고는 위구르인의 실상과 고민을 알기 힘들다는 것을 실크로드 여행으로 느끼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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