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롭게 쓴 대통령의 힘
내일신문 2012-11-01 15:13:17
대통령 선거전은 아무리 큰 다른 뉴스거리가 있을지라도 이를 집어삼키며 사람들의 관심을 흐트러뜨리거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다. 한국이 녹색기후기금 (Green Climate Fund)을 인천 송도로 유치한 뉴스도 그런 일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녹색기후기금은 새롭게 부화하는 국제기구다. 정부와 언론은 이 기구를 '환경 분야의 세계은행 또는 IMF'라고 말한다. 한국인의 뇌리에 새겨진 IMF(국제통화기금)의 강인한 인상을 십분 활용한 비유다.
국제질서의 패러다임 변화는 새로운 질서를 탄생시킨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영국을 주축으로 한 서방 세계 재무장관들이 미국 산골마을 브레튼우즈에 모여 소위 브레튼우즈협정을 체결했다.
그 협정에 따라 국제통화질서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만든 기구가 국제통화기금(IMF)이고, 전후 부흥과 개발도상국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 세계은행(IBRD 또는 World Bank)이다. 이 두 국제기구는 세계경제 성장 및 글로벌화에 힘입어 유엔 산하기관이면서도 유엔보다 더 막강한 힘을 60여년 이상 발휘해오고 있다.
녹색기후기금도 기후변화라는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국제금융 기구다. 1992년 리우환경정상회의에서 채택된 기후변화협약은 선진국과 개도국이 "공통적이지만 개별적인 책임"을 진다는 기본정신에 입각, 기후변화에 보다 책임이 큰 선진국이 개도국의 적응을 도와주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논란 끝에 2010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제16차 기후변화당사국총회에서 녹색기후기금(GCF)설립이 구체화된 것이다.
녹색기후기금은 선진국이 출연해서 기금을 만들고, 개도국이 지원을 받는 시스템이다. 세계은행이 개도국의 개발을 지원하는 것과 비슷한데, 다만 그 지원대상이 기후변화와 관련된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돈을 받는 개도국이야 문제가 덜 복잡하지만 돈을 내놓는 선진국은 출연규모와 기구 운영을 놓고 계산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
송도가 국제사회에 내놓을 간판
국제정치에서 웬만한 지위를 가진 나라들은 국제기구를 유치하고 싶어 한다. 요즘 국제기구는 거의 유엔의 외투를 입고 있지만, 비록 소규모일지라도 유엔 관련기구 유치에 각국이 혈안이다. 그러니 잠재성이 큰 녹색기후기금 사무국은 어느 나라에게도 탐스러운 존재다. 따라서 그 사무국을 어디에 두느냐가 마치 한국에서 정부기관의 지방이전을 바라보듯 각국의 관심사가 된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2020년까지 연간 1000억 달러의 기금이 조성되고, 내년 독일 본에 있는 임시 사무국이 송도로 옮겨오면 여기에 근무하는 직원 수가 500명이 된다. 고용 등 경제유발효과가 만만치 않으니 인천 시민이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모양이다. 그에 못지않게 기대되는 것은 외양만 국제도시인 송도가 국제사회에 내놓을 간판이 생겼다는 점이다. 사실 녹색기후기금은 기후변화 이슈의 확대에 따라 그 몸집과 활동이 불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세상 일, 특히 국제정치가 개입된 일들이 우연히 그냥 되는 법은 없다. 기본적인 구상이 있어야 하고 치밀한 계획을 꾸미고 돈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 이번 녹색기후기금 사무국 유치에서는 독일의 본과 스위스의 제네바 등 유럽 국가의 전통적 국제기구 도시가 후보로 나섰고, 특히 본은 초반에 절대적으로 우세한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한국이 녹색기후기금 사무국을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력을 포함한 국력, 선진국과 개도국 중간의 국제적 위상 등 다양한 요인의 종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여건일 뿐이지 유치계획을 밀고나가는 추진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언론보도를 보거나 정황을 보면 이 역할을 한 것이 이명박 대통령인 것 같다. 그에 대한 임기말 평가는 엉망이다시피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색기후기금 사무국 유치만은 좋은 치적이라 말하고 싶다.
GCF 사무국 유치만은 좋은 치적
환경과 녹색성장을 외치는 이명박 대통령을 볼 때 마다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그가 밝히는 환경정책이나 연설에서 기후변화와 인류문명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사유의 관점을 찾아보지 못했다.
반면 그는 기후변화와 환경문제로 야기될 경제 여건이나 사업적 기회 포착에서 센스가 뛰어난 것 같다. 국가 원수가 미래의 위기를 끌어들여 겁부터 주는 것이 리더십의 본령은 아니지만 위기의 본질에 대한 진단과 성찰 없이 환경문제의 비즈니스 기회에만 착안하는 듯한 의제 설정은 철학의 빈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아쉽다.
녹색기후기금은 완결된 기구가 아니라, 국제사회가 키워나가야 할 조직이다. 차기 대통령은 부산물을 챙기는 데서 한발 나아가 녹색기후기금의 역할이 세계를 정말 이롭게 하도록 한 단계 수준 높은 리더십을 발휘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