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다리 어머니의 추억
자유칼럼 2012-10-16 15:05:53
정말 오랜만에 강릉에 다녀왔습니다. 강릉에 갈 때마다 내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소나무 숲입니다. 어디를 가도 황적색 줄기에 짙푸른 솔잎이 우거진 소나무 숲을 볼 수 있어 좋습니다.
예전에 보았던 강릉은 그동안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고층 아파트 건물이 야산의 스카이라인을 뚫고 하늘로 치솟았고, 오죽헌은 공원화가 너무 광범하게 진행되어 화장을 짙게 하여 본디 모습을 잃어버린 여인과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강릉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 숲의 기상이 워낙 싱싱해서 '강릉은 역시 강릉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강릉 구경은 소나무를 보러 간 것은 아닙니다. 경포대나 오죽헌을 보러 간 것도 아닙니다. 아주 색다른 행사에 참석하기 위한 나들이였습니다.
오죽헌 근처에 ‘죽헌’ 저수지’가 있습니다. 저수지 둑 아래로 시내를 따라 좁은 포장도로가 나 있고 그곳에 단청을 한 정자가 하나 서 있습니다. 가까이 가서야 그게 조그만 공원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정자엔 ‘思母亭’이라는 현판이 걸렸고 큰 암석에 ‘사모공원’이라고 새겨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객이 얼핏 보면 강릉의 향토 역사를 떠올리며 효의 고장답게 어머니를 생각하는 공원을 하나 만들었구나 하고 생각할 듯도 했습니다.
강릉 사람들은 이곳을 ‘핸다리’라고 불렀습니다. ‘하얀 다리’, 즉 白橋를 뜻합니다. 그날은 핸다리 사모공원에 까만 양복을 입은 시장님과 국회의원님도 왕림했고, 조순 전 서울시장도 흰 눈썹을 날리며 지팡이를 짚고 참석했습니다. 백교(白橋)문학상 시상식이 열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서울과 강릉에서 온 100여명이 공원에 앉아 시상식을 구경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자유칼럼그룹 필진 칠팔 명도 끼어 있었습니다.
백교문학상은 사친문학(思親文學)에 한정해서 수여되는 아주 독특한 문학상이라는 걸 여기 와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를 사모하는 애틋한 감정을 시나 수필 등 문학으로 승화시킨 사람에게 주어지는데, 올해 시상식이 벌써 세 번째라고 합니다.
시인 2명과 수필가 2명이 올해 백교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축사를 해주는 사람들은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을 배출한 강릉의 효 사상을 언급하면서 이 상이 오래 유지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소나기 때문에 잠시 천막으로 대피하는 해프닝도 있었으나 수상자들이 모두 마이크 앞에 서서 수상소감을 말했습니다. 살아 있는 부모 또는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절절한 생각을 참석자들에게 전했습니다.
대상을 받은 최승학 시인의 작품은 ‘어머니라는 이름의 여자’라는 시였습니다.
여자는 장미 빛이다.
여자는
청보리밭에서 꺼내온 공기 같이 피어
어머니로 지는 꽃
“어머니로 지는 꽃”이라는 구절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리고 스피커에선 애틋하고 아름다운 선율이 가을 공기를 갈랐습니다.
백교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인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자유칼럼그룹의 필진 중 한 사람인 오마리 씨가 수상자가 되었기에 축하하러 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상을 제정한 백교문학회 권혁승 회장을 응원하러 갔습니다.
이 글을 쓰게 된 디딤돌은 오마리씨의 수상이지만 이 글의 종점은 바로 권혁승 회장의 행적에 대한 생각입니다.
권 회장은 나의 한국일보 선배 언론인입니다. 내가 입사했을 때 그는 경제부장으로 하늘같이 높기만 했습니다. 게다가 경제부에서 일할 기회가 없었던 나에게는 일과 관련하여 그를 접촉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아침 해장국집에서 만나면 계산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밥값을 지불하고 나간다는 그의 제스처가 대선배와 풋내기 기자의 관계였습니다.
불현듯 권 회장과 관련된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가 떠오릅니다. 1981년 늦가을 내가 김포공항 출입기자로 일을 시작할 무렵 대한항공 747 점보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하려다 미끄러지면서 수십 명의 승객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비행기에 불이 붙자 약 4백명의 승객이 탈출하느라 아비규환을 이뤘고 얼마후 동체는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권 회장은 그 비행기의 승객이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당시 불길이 치솟는 점보기에서 탈출해 나온 그의 모습을 처음 본 사람이 한국일보 사건 기자였던 임철순 씨(자유칼럼그룹공동대표)였습니다.
물어보지 않아 모르긴 해도 죽음의 문턱에 섰던 그 사고로 인해 심경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쨌든 신문사에서 퇴직한 후 그는 나의 기억 속의 인물이 된 셈입니다. 강릉 사람, 경제통 기자, 비행기 화재에서 구사일생한 탈출자, 편집국장을 두 번이나 역임할 정도로 한국일보가 중용한 언론인 등이 내게 남아 있는 기억들입니다.
이렇게 나의 기억 속의 인물이 된 후로도 그는 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냈고, 서예에 정진하여 '덕전'(悳田)이란 아호로 전시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는 고향 강릉에서 색다른 일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강릉을 효의 요람으로 만드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습니다. 백교문학회를 만들어 문학상을 제정했습니다. 돈의 흐름이나 얘기해왔을 법한 40년 경력의 퇴직 경제기자가 아니라 사친문학의 대후원자로 변신해 있었습니다.
시상식이 열렸던 핸다리 사모공원은 권 회장이 코흘리개 적 무명치마를 입고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걸어오던 어머니를 기다리고 마중했던 길이라고 합니다. 그에게 ‘핸다리’란 말은 지명이라기보다는 어머니와 동의어로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사비를 들여 공원 부지를 사들이고 사모정을 지어 강릉시에 헌정했습니다.
그는 아놀드 토인비가 한국이 인류문화에 공헌한 것이 바로 효 사상이라고 갈파했던 점에 착안해서 한국의 효(孝)바람이 한류에 버금가는 물결을 일으킬 것을 소망하며 강릉을 사친문학의 요람으로 발전시키려고 정성을 쏟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마리 씨가 백교문학상을 수상하지 않았다면 이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을 터이고, 백교문학상이 뭔지도 몰랐을 것이고, 선배의 행적도 모르고 말 뻔했습니다. 오랜만에 본 권 회장의 어깨는 무거워 보였고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는 표정 너머엔 소나무 숲처럼 싱싱하고 아름다운 기운이 흐르는 듯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버스에서 보는 황혼 녘 소나무 숲이 참 시원해보였습니다. 강릉은 정말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