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태양을 바라보다
“익명을 요구한 삼성관계자는 ‘17일 삼성전자 화성 사업장에서 열릴 예정인 반도체라인 기공식에 이건희 회장이 참석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며칠 전 이건희 삼성그룹회장의 움직임에 대한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삼성에서 반도체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최고 경영자가 반도체 라인 기공식에 참석하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건희 회장이 그 행사에 참석하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두기 위함이라는 식이다. 기업 경영자가 아니라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의 거동을 보도하는 기사를 닮았다. 다른 회사와는 사뭇 차별되는 삼성의 규모와 그 조직 문화를 느끼게 하는 글이었다.
이건희 삼성회장이 경영일선에 복귀하고 나서 향후 10년 청사진을 밝혔다. 태양전지, 자동차용전지, 발광다이오(LED), 바이오제약, 의료기기 등 5개 분야에 2020년까지 무려 23조3000억 원을 투자한다는 내용이다.
삼성은 참 크다는 생각이 든다. 큰 만큼 계획도 장기적이고 거창하다. 투자규모만 거창한 것이 아니라 비전도 그렇다. 삼성은 성장 동력으로 환경과 헬스케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회장은 경영에 복귀하면서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제품들이 사라진다.”고 위기론을 던졌다. 휴대전화와 반도체가 10년 안에 사라질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세계적 트렌드에 부응하는 신제품과 신기술이 필요하다. 그 트렌드가 무엇인가. 이회장은 환경과 헬스케어를 꼽은 것이다.
이 회장은 “환경보전과 에너지고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국정부도 투자하고 있다. 인류의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이는 사업은 기업의 사명이기도 하다.”고 원칙론을 말했다. 그러나 그의 경영본색은 “다른 글로벌 기업들이 머뭇거릴 때 과감하게 투자해 기회를 선점해야 한다.”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이건희 회장의 화두에서 ‘환경보전’이란 말을 꺼낸 것은 음미해 볼 만하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이 저탄소녹색성장을 강조하는 마당에 정책적으로 부응하는 측면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친환경 트렌드에 관심을 갖기 훨씬 전에 환경문제와 기업경영의 상관관계를 읽은 흔적이 많다.
10년 전 삼성임원으로부터 이런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1993년 이회장은 그룹산하 기업체 사장을 불러놓고 기업체마다 폐수가 흘러나오는 곳에 연못을 만들어 잉어를 기르되 그 잉어가 죽으면 책임지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해에 ‘삼성지구환경연구소’라는 조직을 신설했다. 삼성이 대변혁을 꾀할 때였다.
짐작건대 다음 두 가지 사건이 어떤 계기를 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1991년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두산의 낙동강 페놀오염 사건이 있었고, 1992년 리우 지구환경정상회의가 열렸다. 페놀오염 사건은 한순간에 기업이 망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줬을 것이고, 리우 회의는 글로벌 경영을 하는 기업에게는 새로운 위험과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말해주는 전조였다.
삼성은 제품의 80퍼센트를 해외에서 판다. ‘친환경제품’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삼성은 글로벌 경영을 통해 이를 체득했고, 한발 나아가 미래성장 동력을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환경과 에너지의 딜레마에서 찾은 것으로 풀이된다.
이건희 회장은 태양을 바라보고 있다. 삼성이 향후 10년간 태양전지에 6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건 획기적이다.
끝없이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태양은 지구 에너지의 원천이다. 태양이 있기에 수력 풍력 조력(潮力)이 생기는 것이고 수천만 년에 걸쳐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가 형성되었다.
21세기 현대문명을 유지하려면 전기와 같은 효율적 에너지가 필요하고, 지금은 화석연료나 원자력이 이를 담당하고 있다. 현재 필요한 에너지에서 화석연료가 담당하는 몫은 85퍼센트다. 2050년에는 에너지 수요가 2배나 늘어난다. 그런데 화석연료는 고갈되고 있을 뿐 아니라 기후변화를 촉발하고 있다. 하루빨리 화석연료 시대를 벗어나야 할 판이다.
그 궁극적 대안으로 태양에너지와 수소가 거론되고 있다. 지구가 한 시간 동안 태양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에너지 총량이면 인류가 일 년 간 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태양 에너지를 모아 전기와 같은 효율적인 에너지로 바꾸는 것은 지난한 기술적 장벽에 부딪친다. 수소경제 시대도 궁극적으로는 태양에너지를 이용하여 물에서 수소를 추출해야 이뤄질 수 있다. 태양에너지 기술발전은 그래서 더욱 절실하다.
삼성이 2020년 반도체나 휴대폰을 생산하는 회사가 아니라 태양전지와 자동차 전지를 생산하는 기업으로 변신한다는 것은 흥미롭지만 쉽게 다가오는 이미지는 아니다. 과거 설탕가루와 양복천을 만들던 회사에서 TV와 반도체를 만드는 회사로의 변신이 우리 사회와 국가를 어떻게 바꿨는지를 생각할 때, 태양에너지 개발에 대한 기대는 삼성만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