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스티브 잡스의 유산

구상낭 2022. 11. 11. 12:37

내일신문 2012-09-04 21:00:02

 

"훌륭한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애플이 창업 후 초기 단계에서 새 아이디어에 갈증을 느낄 즈음 스티브 잡스는 사원들에게 이 피카소의 명언을 전해주곤 했다. 잡스가 그렇게 한 건 그래픽인터페이스 연구 분야에서 앞서 나갔던 제록스(Xerox)연구센터를 방문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연구센터에는 앨런 케이라는 통찰력 있는 과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미래를 예측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 미래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라는 격언을 남겼다. 잡스는 이 말을 가슴깊이 새겼고 제록스가 가진 디지털 아이디어를 수집하려고 애를 썼다.

혁신은 아이디어를 실행으로 옮겼을 때만 꽃핀다는 게 잡스의 신념이었다. 1983년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의 그래픽인터페이스 개발단계에서 애플의 아이디어를 베껴 갔다. 화가 난 스티브 잡스는 빌 게이츠에게 "애플을 훔쳤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빌 게이츠가 역공했다. "제록스 있지 않아? 그 집에서 텔레비전 세트를 훔치고 나와서 살펴보았더니 이미 네가 그 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훔쳐갔더라."

이 에피소드는 디지털 산업의 초기 발전 단계에서 아이디어와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벌어졌던 실리콘밸리의 무용담과 같은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한 세대 전의 일이다. 지금 애플은 시가총액으로 세계 최대의 기업일 뿐만 아니라 산업의 흐름을 주도해나가는 소위 파워엔진이다.

애플이 삼성전자를 상대로 특허권 침해 소송을 미국연방법원에 제기해 1심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삼성전자는 10억5000만달러의 손해배상금을 무는 배심원 평결을 받는 한편 갤럭시S2 등 관련 제품의 미국 내 판금조치를 받을 위기에 놓여 있다.

국내 언론이 '세기의 재판'으로 규정하는 이 특허권 소송을 놓고 일어나는 여론 형성을 보면 흥미로운 일면을 읽을 수 있다. 마치 미국과 한국이 정부 또는 국가 대결의 재판 전쟁을 치르는 것 같다. 삼성전자가 국내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한국IT산업의 대표선수라는 점에서 국민적 관심과 응원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아이디어는 실행에 옮길 때 꽃피는 것

일본 법원이 비슷한 특허권 침해로 제기된 삼성-애플 소송에서 삼성의 손을 들어줬기에 망정이지, 그 재판에서 삼성이 패했다면 독도 문제와 결부되어 우리 사회에서만큼은 미국과 일본이 연합해서 한국 죽이기에 나섰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언론이 이번 삼성-애플 특허 소송사태를 미국의 '애국재판'이라고만 규정짓는 것은 반쪽의 진실만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디지털 세계의 표준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 기업 간의 주도권 싸움과, 상품의 기능과 디자인을 넘어 모양과 느낌까지도 보호하려는 트레이드드레스(trade dress)라는 이름의 특허권보호 추세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여기에 스티브 잡스의 유산(legacy)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스티브 잡스는 죽기 전에 전기 작가 월터 아이잭슨에게 그의 분노를 이렇게 토해냈다.

"구글은 아이폰을 훔쳤다. 내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애플 계좌에 있는 400억달러를 다 써서라도 이를 바로잡겠다. 안드로이드는 훔쳐간 장물이기 때문에 난 그걸 파괴하기 위해 핵전쟁을 벌일 것이다."

삼성 스마폰의 운영체제는 구글이 개발한 '안드로이드'이다. 그래서 애플-삼성 재판은 본질적으로는 애플과 구글의 대리전으로 보는 게 실리콘밸리 관찰자들의 시각이다. 잡스는 이동통신은 자신의 영역이고 구글의 영역은 검색사업이라고 생각했는데 구글이 안드로이드 개발을 통해 전화 사업을 넘보자 참을 수가 없었다.

잡스는 생존 당시 구글을 찾아가 안드로이드 운영시스템이 아이폰의 모양(look)이나 느낌(feel)을 채택한다면 소송하겠다고 통고했다.

2010년 구글이 제공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탑재한 HTC(대만)의 스마트폰이 나오자 스티브 잡스는 HTC를 제소했다. 그리고 올해 그의 후계자들은 업계 최대 적수로 등장한 삼성을 제소한 것이다.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이긴다

애플의 승소에 대한 평가는 미국언론에서도 부정적 견해가 적지 않다. 비판 이유는 이번 평결에서처럼 특허권의 지나친 보호가 IT산업의 혁신을 방해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미국 IT산업계에서는 운영체제의 소스코드 공개를 놓고 MS와 구글의 개방체제와 애플의 폐쇄체제 간의 본질적 논쟁이 있다. 빌 게이츠와 다수의 기업가들은 안드로이드의 개방체제가 지배할 것이라고 예측하지만, 애플의 강력한 존재감은 일방적 평가를 주저하게 만든다.

애플이 벌이는 싸움을 보면서 두 가지 상념이 떠올랐다. 첫째 '죽은 제갈공명이 살아 있는 사마중달을 이긴다'는 삼국지의 에피소드가 연상되었다. 둘째 21세기 산업주도권 싸움의 중심이 되고 있는 정보통신 분야에서 한국 기업의 기세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