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트롱에게 윙크를
자유칼럼 2012-08-30 11:27:40
‘문워크’(Moonwalk)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마이클 잭슨을 연상할 것입니다. 발동작이 뒤로 미끄러지는 것 같은데 몸은 앞으로 밀려 나가는 마이클 잭슨의 춤에 1980년대 세계의 젊은 여성들은 공연장에서 혼절하여 앰뷸런스에 실려 나가기도 했습니다. 이 댄스 동작은 20세기 전반 미국에서 선보였지만, ‘문워크’란 말이 붙여진 것이 1969년 늦가을이라니 그해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워커’(moonwalker)는 닐 암스트롱입니다. 50대 이상 사람들은 1969년 한여름 밤 흑백 텔레비전 앞에 앉아 우주인 닐 암스트롱이 달착륙선 이글호 사다리를 타고 내려나와 달에 첫발을 디디고 껑충껑충 걷던 모습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닐 암스트롱이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습니다. 그리고 암스트롱보다 한 달 앞서 미국 여성 최초로 우주여행의 기록을 세운 샐리 라이드가 췌장암으로 61년의 생을 마쳤습니다. 지난 20세기 후반 어린 꿈나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두 명의 롤 모델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암스토롱과 라이드는 우주탐사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을 남겼지만 세상의 유혹에 곁눈질을 하지 않고 자신의 삶의 가치를 지킨 사람들로 미국인들의 가슴 속에 감동으로 남는 것 같고, 멀리 떨어진 우리에게도 교훈을 주는 것 같습니다.
닐 암스트롱은 운명적으로 타고난 우주인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모는 비행기를 처음 탔고, 자동차운전면허도 받기 전인 15세에 비행기 조종면허증을 받았을 정도로 하늘을 나는 일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항공우주분야 엔지니어의 꿈을 안고 있던 그는 퍼듀대학 재학 중 해군 조종사가 됩니다. 1951년 한국전에 참전하여 78회에 걸쳐 북한 출격에 나섭니다. 원산폭격 중 북한군 포격에 비행기 날개가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비상탈출을 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으니 달 여행을 향한 운명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할 만합니다.
해군에서 제대 후 그는 엔지니어와 테스트 파일럿으로서 활약하는 등 하늘을 향한 도전을 합니다. 그는 자신이 한 세대 전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아마 비행기를 처음 제작한 라이트 형제, 첫 대서양 횡단 비행을 한 린드버그, 첫 음속돌파를 한 척 예거와 같은 위대한 시대의 항공인과 같이 못한 것이 이유였던 모양입니다. 그런 암스트롱에게 달에 첫발을 내딛는 아폴로 11호 선장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달에 발을 디딘 사람은 12명입니다. 닐 암스트롱은 첫 번째 문워커로서의 위대한 업적과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명성을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이용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미국의 영웅으로 떠오른 그를 민주당과 공화당이 정치적으로 유혹했지만 암스트롱은 거절했고, 정부의 고위직 제의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첫 우주인이었던 존 글렌이 연방 상원의원에 진출하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도전하는 등 권력을 추구했던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암스트롱은 달 착륙 후 강연여행을 다니고 항공우주국의 데스크 직책을 잠시 가졌지만 점차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했습니다. 고향 오하이오주로 물러나 농장에서 살며 대학에서 항공우주공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그는 결벽증일 정도로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는 사람을 싫어했습니다. 자신의 사인을 경매에 내놓아 팔아먹은 사람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고 이로 인해 들어온 수입을 대학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이발사가 자신의 머리를 깎아준 후 그 머리털을 3천 달러에 팔아치운 것을 알게 된 암스트롱이 머리털을 내놓든지 받은 돈을 지불하든지 하라는 요구를 했고, 이발사가 돈을 내놓자 이 역시 대학에 기부했습니다.
무엇이 암스트롱으로 하여금 돈과 명성과 권력을 멀리하게 했을까요. 그의 천성일지도 모르고 삶의 신조일지도 모릅니다. 30여 년에 걸쳐 그의 청년 시절과 우주인의 삶을 지켜본 첫 부인 자넷 암스트롱이 그리는 남편의 심성에서 그 편린을 찾아볼 수 있을 듯합니다. “암스트롱은 수만 명의 사람들이 노력한 대가로 이룩된 일에 쏟아지는 갈채를 혼자 받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1983년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인으로 우주왕복선 챌린저호를 탔던 샐리 라이드도 명성을 타고 화려한 길을 걷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라이드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를 취득하고 우주인이 됨으로써 당시 여성에게 드리워진 유리벽을 깬 사람입니다. 그녀가 탄 우주선이 하늘로 치솟을 때 수백만 명의 어린 소녀들이 우주인이나 과학자의 꿈을 꾸며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고 당시 언론은 전했습니다.
라이드는 회고록도 쓰지 않았고 자신의 스토리를 영화로 만드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에 자신의 이름을 팔고 싶지 않았다고 회고했습니다. 개인 생활을 지키는 것이 유명해지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녀가 우주인의 일을 마치고 주력한 일은 교수 생활이었고, 어린 소녀들에게 과학과 수학을 공부하도록 홍보하는 회사를 만든 일이었습니다.
라이드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우주인으로 만든 동기는 유명해지거나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인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우주 속으로 날아보고 싶었고, 무중력의 우주선에서 붕 떠보고 싶었고, 하늘에서 멀리 떨어진 지구를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두 사람의 우주인을 하늘나라로 보내며 우리가 어렸을 때 밤하늘의 은하수를 바라보며 들었던 이야기, 별똥별이 하늘에 긴 직선을 그으며 떨어지면 누군가 죽은 것이라고 믿었던 옛이야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미국에는 닐 암스트롱의 추모 물결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암스트롱을 추모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유가족이 전하는 메시지가 짠하게 가슴을 울립니다.
“맑은 밤 당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달을 보거든 암스트롱을 생각하며 한 번 윙크해주세요.”
그러고 보니 내일모레 보름달이 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