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와 포스코
자유칼럼 2012-07-18 10:28:48
지난 주말 여수엑스포와 포스코의 광양제철소를 구경했습니다. 여수를 마지막으로 가본 것은 1980년 대 초반이었고, 광양제철소 구경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30여 년 전 여수는 좁고 꼬불꼬불한 시가지에 낡은 양철집이 즐비하여 일제식민시대의 잔영이 남아 있었고, 산비탈엔 농경지가 많아서 옛 항구도시의 향수가 묻어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여수는 상전벽해라고 해야 할 만큼 달라졌습니다. 도심의 고층 건물, 산비탈에 들어찬 아파트 숲, 주변 해변을 따라 무수히 줄 서 있는 공장시설, 여수반도와 광양시를 잇는 아름답고 웅대한 이순신 대교, 외항에 둥둥 떠 있는 초대형 선박 등은 한국이 산업 국가이자 해양 국가임을 증명하는 데 모자람이 없어 보였습니다.
서울에서 신문만 보고 방송만 들으면 사회가 온통 부정과 불의로 붕괴될 것만 같은데 이렇게 돌아다녀 보면 그 동안 산업도 발달하고 도시도 크게 성장했고,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는 실물기반이 있다는 데서 위안을 얻게 됩니다.
지금 한창 열리는 엑스포 덕택에 여수는 더욱 역동적인 것 같습니다. 여수항에 세워진 엑스포 기업관이나 국제관 입구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관람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여수 역사상 초유의 인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엑스포 구경의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그 많은 내국인들이 몰려드는 것은 역시 아직은 소득수준이 높아진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시내서 멀리 떨어진 횟집 주인의 “장사가 잘 된다.”는 말에서 느끼듯이 여수는 지금 엑스포 붐 타운입니다.
여수 엑스포에 가면 디지털 기술을 절감합니다. 여수 엑스포는 해양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기업관, 국제관, 한국관을 잠시 구경하면서 느낀 것은 모든 쇼가 디지털 이미지에 의해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디지털 기술은 지난 30년 동안 모든 분야에 걸쳐 사회 변화를 촉발했고, 앞으로 30년 후의 세상을 더욱 몰라보게 바꿔버릴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여수 엑스포의 흥분된 현장을 구경하는 내내 내 마음을 채우는 이미지가 따로 있었습니다. 전날 광양제철소에서 본 거대한 용광로였습니다. 제철소의 배려로 잠시 용광로 뚜껑이 열린 상태에서 쇳물이 쏟아지는 모습과 열연처리과정에서 시뻘건 쇳덩이가 롤을 타고 내달리는 뜨거운 실물 이미지가 엑스포 현장의 현란한 디지털 이미지를 덮어버리는 듯했습니다.
철광석과 코크스가 용광로에서 만나 2천5백도의 쇳물이 되어 열연과정을 거쳐 핫코일 제품으로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8시간이라고 합니다. 외국에서 철광석과 코크스가 채광되고 운반되려면 수 개월이 걸립니다. 석탄기의 식물이 유연탄으로 변하기까지는 수천 만년이, 빅뱅에서 수소원소가 철원소로 변해 지구가 철광석을 품어온 것은 억겁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인간은 이 철광석을 불과 몇 시간 만에 강철로 만들고, 며칠 만에 자동차로 둔갑시킵니다.
우리 조상들은 삼국시대에 철을 생산해서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적인 용광로를 세우고 철을 생산하게 된 것은 40여 년밖에 안 됩니다. 철의 생산은 곧바로 국력을 상징해왔습니다. 16세기 중국의 명나라는 당시 세계 최대의 철 생산국이었고, 아울러 세계 최대의 GDP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업혁명과 더불어 영국이, 뒤이어 독일 미국 일본이 차례차례 제철국가로 부국강병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일본을 뒤따라 한국이 제철국가의 대열에 단단히 올라섰습니다.
한국은 제철국가이기에 전자산업을 일으켰고, 세계 5대 자동차 생산국가로 올라섰으며, 조선 강국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무대로 올라서는 데는 역시 철강 산업에 대한 투자가 있었습니다. 덩샤오핑이 20여 년 전 박태준을 데려가겠다는 실토를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중국은 제철의 역사가 오래일 뿐 아니라 400년 전에 세계 최대 제철국가의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13억 인구가 추구하는 것이 옛날식으로 얘기하면 부국강병(富國强兵)이 아닐까요. 부국강병의 상징은 철입니다. 중국의 제철기술은 한국보다 10년 정도 뒤떨어져 있다는 말이 들립니다. 단일 용광로 규모로 얘기하자면 중국이 세계 최대의 용광로를 가졌지만 용광로의 효율로 보면 광양제철소가 제일이라고 합니다. 제철기술을 한국에 전했던 일본이 가끔 포스코에 기술자문을 청하기도 한답니다. 이제 한중일 3국의 기술격차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시대로 접어드는 것 같습니다.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인류는 첨단소재를 개발해내고 산업적으로 다양하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천년 전후를 지속해온 철기 시대가 끝났다는 징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새로운 소재의 유용함이란 게 아직까지는 철기문화의 기초 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치면 광양만 개펄 위에 세워진 거대한 제철소의 모습이 새롭게 부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