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그룹

박태준의 추억

구상낭 2022. 11. 10. 12:47

자유칼럼 2012-04-02 18:52:05

 

철강인 박태준의 전기 ‘朴泰俊’(이대환 지음 현암사 펴냄)을 100일쯤 걸려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데 100일 걸렸다는 것을 아는 이유는 작년 말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읽기 시작해서 800여 쪽의 책을 완독할 즈음 그의 100일 탈상 추도식 기사를 신문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박태준에 대해 유달리 남다른 관심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박태준의 전기를 읽어보겠다는 생각을 특별히 했던 것도 아닙니다. 포항제철과 박태준이 뉴스에 떠오르기 시작할 때 청년시절을 보내면서 박태준의 인상이 차지철을 닮았다는 생각으로 거부감 같은 것도 갖고 있었습니다.

7년 전인가, 신문사에 근무할 때 누가 보내줬는지도 모르게 집으로 두껍고 투박한 박태준 자서전이 배달됐습니다. 누군가 손바닥 비비는 얘기를 했겠구나 생각하고 그냥 책장에 찔러 넣고 기억에서 내쫓아버렸던 책입니다.

이 책을 다시 꺼내게 된 동기는 이렇습니다. 작년 10월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사망했을 때, 잡스가 자신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타임’ 출신의 저널리스트 월터 아이잭슨으로 하여금 자서전 준비를 허락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그 얼마 후 출판된 아이잭슨의 ‘스티브 잡스’(Steve Jobs)를 한 권 구입했습니다.

역시 두꺼운 책이고 독서 속도가 워낙 느려서 쉬엄쉬엄 읽는데 박태준의 사망 소식을 들었습니다. 왠지 슬펐습니다. 한 시대를 상징했던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상실감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불같이 살다간 스티브 잡스의 죽음과 역시 용광로 같이 살다간 박태준의 인생이 비교되는 연상 작용 때문이었나 봅니다. 약 30년 터울로 미국과 한국에서 태어나 각기 뛰어난 상상력과 기업가 정신으로 IT산업과 철강 산업을 일으켜 세계적으로 족적을 남긴 두 사람의 죽음이 그들에 대한 뒤늦은 호기심을 끌어당겼습니다.

걸출한 두 기업인이 거의 몇 달 사이에 세상을 떴으니 그 전기를 대비해 읽어보면 재미있겠다 싶어 책장을 뒤져서 박태준 전기를 꺼냈습니다. 한 사람은 소프트파워의 창조자이고 또 한 사람은 하드파워의 상징인 철강 산업의 주역이니 시대적 지역적으로 재미있는 대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두 권을 읽다보니 먼저 읽기 시작한 잡스의 전기는 뒤로 밀리고 박태준 전기만 내 곁에 남았습니다.

사실이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서 한국 산업 역사의 한 단면이 바로 포철의 역사이고 그 주역 중 한 사람이 박태준이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전기 작가도 팔은 안으로 굽게 되어 있고 박태준 전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기자 출신인 작가는 많은 인터뷰를 통해 사실 관계를 풀어놓았고, 게다가 포철의 건설과 확장을 둘러싸고 있던 당시 정치상황을 평행선에 올려놓고 서술했기 때문에 단순한 기업인의 전기라고 보기보다 역사 다큐멘터리를 읽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포항제철의 고고의 성이 왜 그렇게 요란스럽고 시끄러웠는지 뒤늦게 마음속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나의 해묵은 사진첩에는 포항제철에 대한 추억이 한 장면 있습니다. 60년대 후반 친구들과 함께 포항으로 여행 갔다가 포항제철 건설현장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입니다. 여름날 뜨겁고 황량한 모래벌판에 외로이 고목 한 그루가 서 있었고, 이 나무를 기념방문의 표적으로 삼아 사진을 찍었습니다.

박태준 전기에도 이 나무 사진이 나옵니다. 마을을 지킨다는 전설을 가진 당산나무라는 이유로 건설 일꾼들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해서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다가 결국 박태준 사장의 지시에 의해 불도저로 잘려나가는 장면입니다. 포항제철과 나와의 유일한 인연 같은 것이어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포항제철의 덕을 딱 한 번 입은 게 생각납니다. 1990년대 초 미국으로 근무를 떠나면서 초등학생인 아이들에게 무언가 한국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하자는 생각에서 포항제철을 구경시키고 싶었습니다. 당시 박태준 민자당 대표를 돕던 조용경 보좌관에게 사정을 설명했더니 포항제철 공정과 직원 자녀를 위한 교육시설을 아주 재미있게 구경하게 해줬던 일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세월이 가면 사람도 가고 그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들도 희미해져버리기 마련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포스코’가 아니라 ‘포항제철’이라고 말하면 얼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일만 모래밭에 제철소를 짓겠다고 야단법석을 떨던 시절을 살았던 사람에게는 ‘포스코’라는 말보다는 ‘포항제철’이라는 단어가 익숙하고 역사의 정취를 느끼게 합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포스코’의 이미지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냥 그렇게 있어왔던, 즉 산업국가 한국의 발전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긴 공기업이자 좋은 직장 정도로 이해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이 생애를 걸고 사명감과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포항제철이 그렇게 급속하게 탄생하고 단단하게 성장하여 오늘의 세계적 포스코가 되었을까 하는 부질없는 의문도 던져봅니다.
인간사(人間事)에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누군가의 아이디어, 의지 또는 집념이 없이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봅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드파워를 상징하는 철강산업을 한국에 구축한 박태준은 잊지 못할 시대적 추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박태준 전기를 책장 속에 담아 두기만 했던 미안함도 해소했으니, 이제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다시 꺼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