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푸틴과 석유

구상낭 2022. 11. 10. 12:37

내일신문 2012-03-13 11:53:15

 

어느새 2,000원 선을 훌쩍 넘어버린 휘발유 가격에 자동차를 모는 서민들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불황일 때 유가는 떨어지는 게 상식인데, 지금 중국마저도 경제성장이 둔화하는 판국에 두바이유 가격은 배럴당 120달러를 넘어서고 있다. 작년 연말부터 이란 핵문제로 호르무즈 해협에 위기감이 감돌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석유의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특성을 실감할 수 있다.

올해 국제 에너지 시장에 파란을 일으킬 수 있는 인물을 꼽으라면 다음 네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이란의 최고 종교 지도자 아야툴라 하메네이는 이란 핵문제를 놓고 대척점에 서 있다. 벤자민 네탄야후 이스라엘 총리도 석유 시장을 뒤흔들 수 있는 요주의 인물이다. 이스라엘의 존립을 위해서라면 이란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을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마당에 블라디미르 푸틴이 러시아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다시 세계 정치무대에 복귀하는 것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자원의존도가 높은 러시아는 유가 상승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푸틴은 선거기간과 당선 후 미국을 비난하고 이란을 편들고 나섰으니 중동 정세에 심상치 않은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푸틴은 권력 안정을 위해서도 석유 값이 오르는 방향으로 국제정치를 몰아갈 것이다.

11시간대에 이를 정도로 세계에서 국토가 가장 넓은 러시아는 사우디와 맞먹는 산유국이며 제2의 석유 수출국이다. 러시아는 옛 소련연방 공산주의체제 때부터 국가재정을 대부분 오일머니로 충당해왔다. 냉전시대 미국과 군비경쟁을 벌이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를 수 있었던 것도 석유와 천연가스로 벌어들인 재정수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에너지 전문가 다니엘 예르긴은 에너지 안보문제를 다룬 그의 저서 ‘더 퀘스트’에서 러시아 정치권력과 석유의 상관관계를 매우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는 1985년 집권한 고르바초프에서 오늘날의 푸틴에 이르기까지 유가가 권력의 안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설명한다.

예르긴의 주장에 따르면 푸틴은 석유자원이 러시아 통치에 미치는 영향을 잘 꿰뚫고 있었고, 국제 유가는 그에게 순풍으로 작용했다. 푸틴은 고르바초프 집권기간에 소련비밀경찰(KGB)요원으로 동독에서 근무하다 독일통일 후 본국에 소환되면서 1990년대 드라마틱한 인생편력을 시작했다. 그는 고향 상페테르브르그에서 개혁파 시장을 도와 부시장으로 일했으나 그의 상사가 선거에 패배하면서 실직자가 됐고 설상가상으로 화재로 집까지 잃었다. 그는 이런 불행을 딛고 공과대학 박사과정에 등록해서 공부를 하게 되는데 이때 그의 국가 통치관이 다듬어졌다고 한다. 그의 박사 논문 주제는 ‘러시아의 광물자원’이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석유와 가스는 러시아 경제부흥의 열쇠로서 세계경제 진입에 큰 역할을 하게 되고 러시아를 경제대국으로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푸틴은 석유 자원에 대한 중앙집권적 국가통제를 제시했다.

푸틴은 논문에서 주장했던 바를 실행할 기회를 이외로 일찍 얻었다. 그는 모스크바로 이동해서 고속 승진 사다리를 타기 시작하여 1988년엔 국가 최고 정보기관인 FSB의 수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이듬해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 의해 총리로 임명되고 그해 12월31일 옐친의 극적인 사임에 따라 대통령권한대행이 된 후 2000년 3월 대통령 선거에서 이겨 최고 권력자가 됐다.

푸틴은 크레믈린궁에 입성하자마자 1990년대의 혼란기에 급성장한 러시아 석유 재벌들을 불러들여 무릎을 꿇게 했다. 푸틴은 석유재벌을 향해 그 동안 축적한 부는 인정하겠지만 금지선을 넘지 말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 금지선이란 킹메이커를 자처하거나 정치적 야심을 갖는 것을 의미했다.

푸틴의 이 요구를 무시하려다가 풍비박산의 신세가 된 사람이 러시아 최대 석유재벌 유코스(Yukos)의 CEO 미하일 표드르프스키다. 그는 소련해체 후 금융과 컴퓨터 사업으로 큰돈을 번 후 정부에 돈을 빌려주고 갚지 못하자 석유회사 지분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했다. 그는 인권운동과 시민운동을 지원했고, 의회를 움직였다. 그는 러시아가 대통령제를 없애고 의원내각제를 가져야 한다고 암암리에 주장하고 다녔다. 푸틴의 눈 밖에 난 표도르프스키는 2003년 가을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시베리아의 한 공항에 내렸을 때 정보기관(FSB)요원들에 탈세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유죄판결을 받고 10년째 시베리아 유형지에 영어의 몸으로 갇혀있다.

푸틴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석유 가스 원자력을 다 합치면 러시아는 세계 에너지의 선두 주자가 된다.” 푸틴은 석유와 가스를 국내 통치의 수단으로 삼을 뿐 아니라 국제무대에서도 지렛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북핵 문제와 고유가의 짐을 안고 있는 한국에게는 푸틴의 말과 행동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