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그룹

따뜻한 자본주의

구상낭 2022. 11. 9. 18:30

자유칼럼 2011-09-09 14:08:02

현대오일뱅크 직원들이 ‘급여 1% 기부’ 운동을 벌이는 기사를 어제 아침 조선일보에서 보았습니다. 어쩌다 한 번 하는 이웃돕기 기부가 아니라 노사가 약정까지 체결하고 연봉의 1%씩을 모아 이웃돕기를 지속적으로 하기로 하고 재단을 설립한다는 것입니다.

 

이 회사의 직원들 평균 연봉은 7,000만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기부에 참가한 사원들은 한 해 평균 70만원을 내놓게 됩니다. 1,850명의 전 직원 중 참여율이 70%가 넘는다고 하니, 재단이 설립되어 활동하게 되면 좋은 일들을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가 됩니다.

 

대기업의 기업주나 부자들이 많은 돈을 출연하여 재단을 만들고 자선사업이나 공익사업을 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됐으나 회사 직원들이 공익재단을 만들어 이웃돕기를 한다는 것은 별로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연봉 규모로 볼 때 현대오일뱅크 직원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소득 양극화 현상에서 어쨌든 수혜자의 편에 서 있으면서, 또한 피고용자로서 잠재적 불안을 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근래 양육강식의 자본주의 폐해를 해소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따뜻한 자본주의’ 개념이 많이 거론됩니다. 그런 논의는 자본주의에서 큰 혜택을 보는 사람들이 사회의 불균형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해소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벌여야 한다는, 가진 자의 책임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현대오일뱅크 직원들이 어떤 길을 가느냐는 ‘따뜻한 자본주의’의 중요한 전범이 되어 진짜 부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자극제가 될지도 모릅니다.

 

근래 재벌기업 총수들이 수천억 원을 출연하여 우후죽순처럼 공익재단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만한 돈을 출연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고 좋은 일도 많이 할 수 있는 규모입니다. 이런 재단이 좋은 일을 하기를 바라고 그것이 소위 ‘따뜻한 자본주의’가 발아하는 온실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전망이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진 자의 겸손과 철학의 빈곤함을 꼽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재벌의 기부를 진정성을 갖고 바라보지 않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MS)를 창업해 록펠러에 이어 미국 역사상 두 번째 부자 반열에 오른 빌 게이츠는 부자의 사회적 책임을 가장 모범적으로 연구하고 실현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게이츠는 MS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94년에 이미 은퇴 후 할 일로 자선활동을 염두에 두고 주식 일부를 팔아 자선재단을 만들었고, 2000년에 이르러 아내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멜린다&빌게이츠재단’으로 확대하였습니다. 게이츠 가족은 290억 달러를 이 재단에 기증했습니다. 우리나라 화폐로 환산하면 약 30조원이나 되는 돈입니다.

 

물론 이 재단의 운영은 빌 게이츠의 영향력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게이츠는 록펠러재단이나 카네기재단 등 과거 미국 부자들이 만들었던 자선재단을 벤치마킹하거나 연구하며 이 재단의 운영과 비전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부자가 돈쓰는 법을 무지 연구한 것입니다.

 

멜린다&빌게이츠재단은 규모도 미국 최대이지만, 자선사업의 성격이나 방향 또한 새로운 차원을 선보였습니다. 그의 재단은 아프리카 사람 등 못사는 나라의 국민이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자본주의 혜택을 못 보는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데 돈을 씁니다. 아프리카 등에서 자선활동을 하는 우리나라 자선단체도 게이츠재단의 지원을 받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게이츠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타임’지에 ‘창조적 자본주의’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창조적 자본주의는 바로 따뜻한 자본주의의 게이츠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 게이츠의 이러한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그가 2007년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행한 감동적인 연설입니다. 그가 대학에 다닐 때 이 세상의 불공평을 보지 못했던 데 대한 자성과 함께 게이츠재단이 이런 문제 해결에 나서고 있음을 소개하며 세계에서 가장 자본주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자본주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실정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하버드 졸업생들에게 자본주의 혜택을 못 받고 질병이나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불공평을 해소하는 데 그들의 재능과 열정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게이츠가 미국의 젊은이들을 향해 그렇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자본주의의 혜택과 함께 자본주의의 해악을 깊이 성찰할 수 있었고, 부자의 역할에 대한 그의 사색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젊은 나이에 자선재단을 만들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행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자선재단을 통한 빌 게이츠의 활동을 보며 우리나라의 큰 부자들, 소위 재벌 총수들의 기부 문화를 생각해 봅니다. 유수한 재벌들은 세계화의 격류를 잘 항해하여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습니다. 돈도 엄청 벌었습니다. 그런데 왜 빌 게이츠 같이 벌어들인 돈을 사회를 위해 쓰는 연구를 하는 기업인은 드문 것일까요. 왜 기업 활동에서 은퇴하고 자선 재단이나 공익 재단을 운영하는 멋진 부자가 없는 것일까요.

 

‘따뜻한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의 보호막인지도 모릅니다. 15년 전에 MIT 교수 레스터 서로가 쓴 ‘자본주의의 미래’는 오늘에 다시 음미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그는 분배의 양극화 문제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충돌하는 단층지대로 지목하고 양극화가 심해지면 대 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1인1표를 주장하는 민주주의와 적자생존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분배가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충돌할 위험이 커지며, 이는 자본주의 체제를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본주의 체제의 최대 수혜자인 기업과 부자들이 ‘따뜻한 자본주의’ 실현에 앞장서야 되는 것이 아닐까요. 돈 버는 것은 부하한테 맡기고 돈 쓰는 법을 연구하는 부자들을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