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태극기가 상징하는 것

구상낭 2023. 4. 26. 23:20

2017-03-23 11:39:04 게재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박근혜 파면'을 선고한 지 며칠 후 서울시청 근처 식당에서 중국 관련 일을 하는 청년 사업가 너댓명과 식사를 했다. 이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그 중 한 사람은 한국 여성과 결혼해서울에 거주하는 중국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중국 여성과 결혼해 상하이에 살고 있는 한국 청년이었다. 점심 화제는 중국의 사드보복 조치에 의한 한중관계 악화였다.

3층 식당에서 내려다 본 시청 앞 광장에는 탄핵반대 집회측이 남긴 텐트와 함께 크고 작은 태극기가 걸려 있었고 옆에 미국 성조기도 하나 걸려 있었다. 누군가 시청 앞 광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자고 제안해서 창을 뒤로 하고 나란히 늘어선 다음 종업원에게 스마트폰을 건네면서 사진촬영을 부탁했다. 종업원이 사진 앵글을 잡고 있는데 갑자기 중국인이 "성조기가 나오지 않게 찍으세요"라고 말했다.

성조기에 대한 중국인 반응이 이해될 것 같았지만 흥미롭다는 생각에 사정을 물어보았다. 그 중국인은 손을 내저으면서 "중국인들은 민감해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서울의 태극기 집회 사진이 내가 가입한 중국 SNS망에서는 한국인들의 반중(反中)데모라고 소개되고 있어요. 한국이 사드를 받아들이고 중국이 대응조치를 취하니까 한국인들이 반중데모를 벌인다는 식으로요. 태극기 옆에 성조기가 있으니 더욱 그래 보이지 않겠어요? 그래서 나도 태극기 집회사진을 찍어 그 SNS망에 올리면서 반중집회가 아니라 서울서 벌어지는 대통령 탄핵반대 집회라고 설명했어요."

이 중국인은 처가(妻家) 나라인 한국을 위해 SNS에서 변명을 했겠지만 '가짜 반중집회 뉴스'를 본 대부분 중국인들은 반한 감정을 더욱 강하게 느꼈을 것 같다. 사드 배치와 중국인의 반한감정, 사드보복과 한국인의 반중감정, 박근혜 탄핵반대 태극기 집회가 이상하게 뒤엉켜 SNS 가짜뉴스가 되어 퍼진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대한민국 상징하는 역사적 정통성

국기(國旗)는 한 나라를 상징한다. 어떤 의미에서 국기는 아무 감정도 없는 헝겊 조각에 디자인한 이미지일 뿐이다. 하지만 그 국가 구성원들이 집단적으로 경험했던 역사적 시련, 도전, 환희 등 희노애락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응고한다.

그래서 국기를 보는 것 자체가 애국심으로 연결된다. 전쟁 중 적대국의 국기를 보고 증오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도 국기의 상징적 이미지 탓이다. 일본 일장기, 중국 오성홍기, 북한 인공기에 대해 한국 국민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정도 여기에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태극기는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역사적 정통성을 갖고 있다. 1882년 고종이 일본에 파견한 수신사 박영효 등이 배에서 처음 도안을 만들어 사용하면서 국기로 사용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던 날 사람마다 태극기를 들고 서울거리에 뛰쳐나온 광경의 사진은 지금 보아도 감동이다.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며 사실상 서로 다른 정치체제로 갈라섰지만 남한과 북한은 다 같이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했다. 1948년 남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하면서 '대한민국'은 자연스럽게 태극기를 계승했고, 북한은 '홍람오각성기'(紅藍五角星旗)를 새로 디자인해 국기로 정했다.

태극기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국민 개개인이 다를 것이다. 개인적으로 국민의례의 대상으로만 태극기를 대했던 내가 태극기를 감동적으로 보았던 것은 1984년 LA올림픽 폐막식 때였다. 스타디움을 꽉 매운 선수와 관객이 엄숙히 바라보는 앞에서 주최국 미국의 성조기가 내려지고 차기 개최국 한국의 태극기가 게양되는 것을 보는 순간 "아, 우리나라가..."라는 감격이 전율하는 걸 느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은 국기를 내걸고 자랑할 일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태극기 들고 편가르기 말아야

그 후 88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태극기는 도약하는 대한민국의 상징으로 세계 곳곳에서 나부끼는 일이 흔해졌다. 이렇게 국가에 대한 자긍심과 국민통합의 상징물이 된 태극기가 대통령탄핵 정국을 만나면서 본래의 이미지가 딱하게 굴절되고 있다.

작년 가을 박근혜 탄핵지지자들이 촛불집회를 열자 박근혜 탄핵반대자들이 맞불 집회를 열면서 태극기를 사용했고 시간이 가면서 국민은 촛불파와 태극기파로 갈라졌다. 여기에 정치색이 짙어지면서 태극기는 바로 박근혜지지자들의 독점물이 되어버린 셈이다.

국민이 정치적 이슈를 놓고 극도로 양분되는 일은 피해야 하지만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도 있다. 문제는 국가 상징물인 태극기를 차지하고 내편 네편으로 가르는 것은 국민 대다수를 굉장히 불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김수종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