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석유 파워의 치킨게임

구상낭 2022. 12. 24. 18:46

내일신문 2015-12-15 23:11:43

 

30년 전 미국 텍사스 휴스턴과 알래스카 앵커리지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아침 모텔 가판대에 놓인 신문 1면의 제목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새카맣고 굵은 글씨의 'Oil Crisis' (석유위기)란 통단 제목에 놀랐다. 석유위기는 곧 중동 전쟁과 동이어로 통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의문은 곧 풀렸다. 석유 생산으로 먹고 사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 석유 값의 하락은 생존을 위협하는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세계는 안정된 저유가(低油價)를 구가하고 있었다. 1970년대 중동 전쟁과 이란 혁명으로 석유 값이 폭등하면서 국제 경제가 질식할 정도의 석유 위기를 겪었기에 당시 저유가의 맛은 정말 달콤했다. 고도성장으로 석유 소비가 급증하던 한국에게 저유가는 더없이 큰 혜택이었다.

12월 들어 석유 값이 배럴당 40달러 이하로 떨어졌다. 작년 여름보다 50% 폭락했다. 석유 값 하락은 석유 소비국에겐 큰 혜택이다. 이것이 지난 50년간 통용되던 석유 경제 교과서의 논리다.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베네스웰라 등 수많은 산유국들은 재정파탄으로 망해간다고 아우성이다. 틀림없이 텍사스와 알래스카의 지방신문엔 다시 석유 위기란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석유 값 폭락의 파급 양상은 좀 다른 것 같다. 산유국이 우는 건 당연하지만, 웃을 줄 알았던 석유 소비국들도 울상이다. 한국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한국 경제의 대들보 역할을 하는 석유화학, 조선, 철강, 해외건설 산업이 유가 하락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석유 값이 올라야 유조선과 석유시추선 주문이 늘어나서 조선소가 잘되고, 조선소가 잘돼야 제철소 등 철강 산업이 활발해진다. 그런데 석유 값이 예상외로 폭락하면서 조선업과 철강 산업이 불황의 늪으로 빠졌다.

조선 주문량이 격감했을 뿐 아니라 주문한 배도 안 가져가겠다고 해약을 하는 판이니 그렇지 않아도 세계적 불황으로 신음하던 조선회사와 철강회사가 배겨날 턱이 없다. 해고가 줄을 잇고 도급회사도 일감을 얻을 수 없어 실업자를 쏟아내고 있다. 울산, 포항, 거제 등 한국에서 고소득을 구가하던 산업 도시들이 신음하고 있는 이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

고유가에도 버텨왔던 석유화학 산업도 비명을 지르고 있다. 원자재 가격의 절감보다 세계적 불황의 여파로 석유화학제품을 사겠다는 소비시장의 위축으로 생기는 손실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오일달러로 일었던 중동지역 건설 붐이 석유 값 하락으로 찬물을 맞으면서 한국 건설 회사들이 일할 곳을 잃어가고 있다. 오일달러가 고갈되어가자 사우디아라비아가 세계 각국에 투자했던 자본을 회수해가면서 한국 금융시장에도 충격을 주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변덕스러운 것 중의 하나가 석유 값이 아닐까 생각한다. 과거 석유 값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국제 정치, 특히 중동 정세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카르텔 영향력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유가결정 요인은 아주 복잡해지고 있다. 중국과 인도의 경제성장은 가격인상 요인이 되지만 미국의 셰일 혁명과 기후변화 문제는 가격 하락 요인이 되고 있다.

최근 석유 값의 하락 추세는 미국의 셰일혁명으로 공급물량이 늘어나면서 OPEC의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게다가 중국의 경기침체 등으로 소비가 감소하는 등 가격하락 요인이 겹쳐졌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석유 값이 더 떨어질 것인가를 놓고 전문가들의 예측은 각양각색이다. 사실 작년 초 석유 값이 100달러 이상일 때 30달러대로 떨어지리라고는 거의 아무도 예측하지 않았다.

석유 값과 관련하여 요즘 가장 인구에 회자되는 관심거리는 사우디와 미국 간의 치킨게임이다. 지난 4일 비엔나에서 열린 OPEC총회에서 감산 결정이 나올지를 놓고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웠다. 저유가로 재정위기에 놓인 대부분 OPEC회원국들이 감산해서 가격을 올리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OPEC 주도국인 사우디가 감산에 반대했다. 이 뉴스에 석유 값은 다시 폭삭 주저앉았던 것이다.

사우디의 전략은 시장점유율 유지다. OPEC이 감산하면 값이 뛰고, 이를 좋아할 것은 미국의 셰일석유 업계이고 감산 의무가 없는 러시아 등이다. 사우디가 놓친 시장점유율을 이들이 차지할 것이다. 특히 새로운 기술을 바탕으로 한 셰일 석유에게 시장을 내주기가 겁나는 것이다. 엄밀히 얘기하면 치킨게임의 당사자는 사우디 정부와 미국의 셰일석유 업계라고 할 수 있다. 사우디는 미국 셰일석유 업계의 손익분기점이 배럴당 60~80달러 선이기 때문에 무작정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우디도 출혈하지만 미국 셰일석유 업계도 생존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건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재미있는 치킨게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