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다시 만져보자
2015-08-17 11:58:22 내일신문 게재
"흙 다시 만져보자." 위당 정인보 선생이 지은 광복절 노래 가사의 첫 구절이다. 잃었던 나라를 되찾은 광복의 감격이 얼마나 몸을 전율케 했으면 정인보 선생의 가슴에서 이런 구절이 솟구쳐 나왔을까.
어릴 때 8월 무더위 속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은 죽을 맛이었다. 면장, 우체국장, 교장의 경축사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다 광복절 노래가 울려 퍼지면 신나게 따라 불렀다.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가 아니라 기념식이 끝나니 좋아서. 노랫말이 무슨 뜻인지 알 리가 없었다.
엊그제 15일은 광복 70주년이었다. 10단위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의 속성 때문인지 시대 조류가 그래서인지 올해 광복절 분위기는 유난했던 것 같다. 건물 벽면마다 대형 태극기가 가득하게 걸리고 방송마다 특집을 만들어 방영했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가 얼마나 발전했고 달라졌는지 많은 자료, 많은 스토리가 방영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말했다 시피 해방 후 70년은 국가경제 성장의 측면에서 얘기한다면 '위대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외교 안보 측면에서 보면 광복 70년은 곧 분단 70년이고, 한일 갈등 70년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의 고통은 해방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남북 분단으로 지속되고 있다. 게다가 평화헌법에 기초해서 침략 역사문제를 느릿느릿 풀어나가던 일본이 아베 정권 출범 이후 급격히 우경화하면서 과거 제국주의 역사를 옹호하는 태도로 돌아섰고, 이 정권 들어 한일 양국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면서 정상회담 한번 하지 못했다.
품격있는 비판이 바람직했을 듯
올해 광복절은 박대통령의 임기를 거의 절반 채우는 시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은 임기동안 펼쳐나갈 정국 구상을 어떻게 그리는지 주목을 끌었다. 특히 박 대통령 집권 이후 아무 진전도 없는 남북한 관계, 그리고 최악의 상태에 있는 한일 관계에 대한 진단과 향후 구상이 관심거리였다.
남북관계와 관련한 박 대통령의 언급 내용을 보면 어떤 변화의 기색은 없어 보인다. 비무장지대 지뢰도발은 비난했지만 대화와 협력의 문은 열어 두었다. 광복100주년의 '통일 한반도 비전'을 언급했지만 북한에 대한 획기적인 제안은 없었다. 그런 계획이 있다 한들 공개적으로 선언할 리야 없겠지만 북한과의 관계 개선 문제에 한계와 피로감을 느끼는 듯하다. 이해할 만하다.
북한은 아마 지구상에서 가장 어려운 협상 상대일 것이다. 하지만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삼으면서 통일을 외치면 북한은 더욱 멀어지려고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전략적 접근이 요구된다.
박대통령은 한일관계를 언급하면서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전날 아베 총리의 '전후70년담화'를 지나치게 의식한 것 같다. 아베 일본 총리는 광복절 하루 전 제국주의 침략역사를 사죄했다. 그러나 그건 누가 보아도 진정성이 없는 '교묘한 변명'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문맥은 모두가 과거형이었다. 중국과 한국에 대한 사과의 태도가 달랐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했다.
국가원수가 대외정책을 표명하는 담화나 연설에서 상대방 국가나 지도자를 직접 비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지만 일방적 궤변과 변명에 대해선 유연하지만 품격 있는 비판이 오히려 바람직했지 않을까 싶다. 정상회담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지만 역사인식과 현실적 교류는 분리하기로 했으니 할 말은 적절히 해야 한다.
불의와 돈만 판치는 사회는 위험
아베총리로 대변되는 일본의 우경화는 일본 내의 시대적 조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도 문명화된 사회이다. 극단적인 사상엔 반작용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평화헌법개정이 계기가 된 지식인 사회의 비판이 그 한 예다. 우리는 옛 서대문형무소에서 무릎 꿇고 사죄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를 보았다.
제대로 된 강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경제력이 없으면 강한 나라의 기반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정의가 흐르지 않고 불의와 돈만 판치는 사회는 위험하다. 그런 나라 국민은 행복할 수 없다. 우리 국민은 지금 행복하지 않다.
"흙 다시 만져보자." 대통령과 정부 정책의 책임자들, 국회에서 국정을 감시하고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 정의가 흐르게 하는 소명을 가진 대법관들이 70년 전 이 구절의 감격을 갖고 세웠던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남이 아닌 자신을 되돌아볼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