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철학을 가진 전문가를 찾아라

구상낭 2022. 12. 11. 23:07

 

내일신문

2014-05-16 16:39:25


 

옛 이야기 한 토막.

1948년 어느 날 캘리포니아공대(Caltec)의 에리 하겐스미트 교수가 시험관에 파인애플을 담아 놓고 성분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는 식물의 향기와 맛에 관여하는 호르몬을 연구해서 세계적 명성 얻고 있던 생화학자였다. 잠시 쉬기 위해 연구실 밖으로 나와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그는 폐를 찌르는 듯한 따가움을 느꼈다. 악명 높던 로스앤젤레스(LA)의 스모그가 칼텍 캠퍼스까지 뒤덮었던 것이다.

그 순간이 계기가 되어 하겐스미트 교수에겐 중대한 심적 변화가 생겼다. 스모그의 원인을 미량 화학물질 분석 방법을 이용하여 밝히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당시 스모그의 주범을 놓고 산업시설, 소각장, 자동차 등으로 의견은 분분했지만 아무도 과학적으로 그 원인 물질을 밝히는 데 앞장설 생각을 못했다.

하겐스미트 교수는 연구 시료로 쓰던 파인애플을 시험관에서 꺼내 버린 후 스모그를 생성시키고 분석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실을 밝혀냈다. LA스모그의 주범이 바로 자동차 배기관에서 나오는 물질이라는 결론을 얻은 것이다. 이 발견으로 하겐스미트는 ‘스모그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LA의 라이프 스타일로 자리 잡은 자동차가 스모그의 주범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학계에서도 비판이 쏟아졌다. ‘과학계의 동키호테’라는 혹평까지 나왔다.

하겐스미트의 연구 결과는 타당한 근거를 갖고 있었다. LA는 한쪽은 바다에 면해 있고 나머지는 높은 산맥으로 둘러싸인 사막의 분지다. 차가운 바다 공기가 따뜻한 분지의 공기 속으로 파고들며 일종의 대기 전도 현상이 일어난다.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태양 볕에 광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며 생성된 스모그가 LA분지를 빠져나가지 못한 채 갇히게 된 것이 그 정체였다.

LA의 인구와 자동차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1954년 10월 초 전례 없던 스모그 재앙이 찾아왔다. 목구멍이 타는 듯 아팠고, 눈이 따가웠으며, 호흡기 질환이 번졌다. 고속도로에서는 가시거리가 짧아 자동차 충돌사고가 속출했고, 공항이 폐쇄됐다. 그 후 스모그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가도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이 재앙은 스모그 대응의 전환점이 되었지만 주지사가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자동차 사용을 자제해주도록 요청하는 대증적 대책이 고작이었다.

1967년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이후 대통령이 됨)은 과거의 대기오염 규제체제를 대폭 강화한 캘리포니아대기보전국(CARB)을 창설했다. 그리고 그 초대 수장에 노(老) 과학자 하겐스미트를 임명했다. 하겐스미트의 지배 아래 들어간 CARB는 엄격한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를 가하기 시작했고, 얼마나 그 기준을 엄격히 했던지 자동차 경영진은 하겐스미트를 가리켜 자동차 산업을 죽이고 살리는 판사와 배심원을 겸한 인물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미국 연방정부는 스모그 피해가 극심한 캘리포니아 주에 특별한 권한을 부여했다. 즉 연방정부의 배출 기준보다 훨씬 높은 배출기준을 허용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주로 하여금 캘리포니아 기준을 적용하든지 연방정부 기준을 적용하든지 택일하게 했다. 캘리포니아가 미국 자동차 판매의 12%를 차지했기 때문에 CARB의 권위는 거의 연방정부의 힘과 맞먹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자동차 회사들로서는 한 모델을 만들면서 배출기준을 두 개로 만들 수가 없어 CARB 규제 기준으로 미국 내 판매 모델을 통일했다. CARB가 배출을 규제하면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따라야 하고, 결국 세계가 따르게 된 것이다.

규제완화를 원하던 레이건 주지사는 1973년 하겐스미트를 해직했다. 그러나 그가 6년 동안 초석을 깔아놓은 CARB의 긍정적 힘은 계속 확장됐다. CARB의 배출규제가 기술발전의 견인차 노릇을 하면서 자동차의 연비효율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고 그 덕택에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미국 도시의 대기 오염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하겐스미트의 이야기는 옛날 저 멀리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오늘의 한국 현실에 대비하여 곱씹어 볼 수 있는 교훈을 준다. CARB의 초대 수장에 스모그의 정체를 밝힌 과학자 하겐스미트를 발탁해 맡긴 레이건 주지사의 용인(用人)방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제의 본질을 깊이 알고, 그 문제 해결에 대한 방법과 열정을 갖고 있는 전문가를 발탁해서 신뢰하고 일을 맡기는 결단이 바로 오늘 한국에서 크고 작은 권력을 가진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리더십의 진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는 관료집단의 기득권 나눠먹기 게임이 더 이상 통할 수 없음과 아울러 제대로 된 전문가들이 적재적소에 등용되어 책임감, 열정, 희생정신을 갖고 합리적 조직 운영을 하라는 마지막 경고음이라고 생각한다. 큰 문제가 터지면 그 대안으로 쉽게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새로운 정부 조직이다. 기존의 관행을 뛰어넘는 새 기구를 만들려면 패러다임을 바꿀 철학을 가진 전문가들이 등용되어야 한다. 그런 전문가를 찾지 못하면 새로운 조직은 옥상옥(屋上屋)이 되어 관료화의 층이 한 겹 더 두터워질 뿐이다.